국사/조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죽음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14. 1. 30. 02:28
반응형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죽음 그는 누구인가?


최근 현빈 주연의 영화 <역린>이 정조를 배경으로 하면서 정조와 함께 많은 주목을 받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정조의 아버지이자 영조의 아들인 비운의 사도세자이다.. 조선 왕조 내에 아마도 이렇게 까지 비참하게 죽은 태자는 없었으리.. 사도세자 그는 누구일까?



 


영화 <역린> 의 주인공이자 MBC 드라마 <이산>의 정조

 

|사도세자의 족보


사실 사도세자의 '사도' 라는 말은 사도세자가 죽고 그를 죽게 명령한 아버지 영조가 위로 하며 지은 시호이다. 사도세자는 후궁의 아들로 왕위를 물려 받은 영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장성왕후 서씨 및 6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비교적 적은 2남 7녀의 자녀 밖에 두지 못했다. 


이 아들 두명중 후궁 정빈 이씨가 낳은 경의군은 일찍 죽고 말았고 영조가 40세 되던 해 후궁 영빈 이씨의 아들로 바로 사도 세자가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영조는(드라마 동이의 아들이라고 보면 된다.) 자기 역시 서출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정하기에는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둘다 후사가 없어서 영조의 걱정은 나날이 깊어져갔다. 여기서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의 나이 66세때 15세의 나이로 왕후가  되어  자신이 후사가 없자 후궁인 영빈 이씨가 낳은 사도 세자를 미워했다. (사도세자 보다 왕비가 더 나이가 어렸다.)





MBC 드라마 이산에서 사도세자 역을 맡은 이창훈 


|사도세자에 관한 야사


사도세자는 영조의 나이 40이 되어서야 겨우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난지 2개월 만에 바로 왕세자로 봉해졌다. 사도세자는 이후 자신의 부인으로 정조의 어머니이자 궁중 문학 <한중록>의 저자 혜경궁 홍씨를 왕후로 맞아들인다. 


영조는 유독 세자에게 만큼은 엄격하고 까탈스러웠기 때문에 사도세자는 자신의 아버지 영조 앞에서 주눅 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또 영조가 없으면 방탕하고 철 없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런 일들을 보고 들은 영조는 사도세자를 마음에 들지 않아했지만 아들이라고는 사도세자 한 명 뿐이라 사도세자가 15살 되던 해 자신을 대신해 대리 청정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때 사도세자를 싫어 하는 당시 실세를 잡고 있는 노론과 대신들 그리고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숙의문씨 등이 사도세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영조에게 고해 바쳤고 그때 마다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는 영조 앞에 끌려 나와 꾸중을 들어야 했다.





사도세자가 갇혀 죽었다던 뒤주 



야사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정신이 이상했다고 하는데 때문에 학문을 게을리 하고 궁녀나 내시를 죽였으며 비구니를 건드렸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사도세자는 나이가 먹어갈 수록 그 옆에 붙어 있는 무리들이 많아졌고 사도 세자는 이곳 저곳으로 멀리 유람을 다녀오며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모두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사도세자와 갈등이 심해지던 찰나에 그가 아끼던 숙의 문씨가 사도세자의 행동들을 영조에게 고해 바쳤을뿐 아니라 정순왕후 김씨가 아버지 김한구와 함께 중인 신분의 나경언으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잘못을 낱낱히 밝히는 죄목을 고하게 했는데 영조는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해서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끌어내고 뒤주 속에 가두고 만다. 


뒤주속에서 있는 8일 동안 물 한모금 먹지 못한 사도세자를 두고 조정은 싸우기 시작했다. 그 중 남인들은 사도세자를 구하려 했고 당시 조정세력의 중심이었던 노론들은 사도세자를 죽이려 했다. 또한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빈 홍씨는 자신의 남편이 죽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노론의 대표였던 그 아버지 홍봉한 역시 사도세자를 싫어 했기 때문에 결국 사도 세자는 뒤주안에서 죽고 만다. 


이것이 야사 이야기....





사도세자의 할머니라고 볼 수 있는 동이 숙빈 최씨 



사실 사도세자의 이야기에서 분명한 것은 영조와의 갈등은 존재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세자의 행실 때문인지 아니면 사도세자를 싫어하는 세력들의 이간질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그러나 영조가 그의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아들을 죽일 만큼 미워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뒤주속에 8일이나 가둔 다음에 죽인 것은 그의 분노가 대단 했다는 것을 뜻하지만 사도세자가 죽자 '사도' 라는 시호를 지어준것을 봐서는 정치적인 목적이 영조를 흔들리게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당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정치적인 당쟁에서 친소론의 사도세자가 노론에게 끊임 없는 공격을 받았고 이에 영조의 마음이 흔들리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이야기다...


물론 당쟁설 역시 설일 뿐이다.





사도세자의 무덤 경기도 화성에 있으며 때문에 정조가 이곳에 성을 쌓고 자신의 아버지를 위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튼 향년 27세로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모습을 정조는 11살이었고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할아버지인 영조 앞에서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결국 영조의 분노를 막지 못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잃고 만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조정대신들은 어린 정조가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을 막으려고 모든 술수를 동원하기 시작했고 아무래도 이것이 영화 <역린>의 배경이 될 것 같다.


과연 영화속에서 펼쳐지는 궁중 암투 <역린>의 내용이 어떻게 관객에게 전해질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를 보기전 사도 세자에 관해 알고 가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