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버스의 계속된 항해와 죽음
지난번 콜럼버스의 신대륙을 향한 첫 번째 도전과 성공에 대해 알아보았다. 콜럼버스는 하지만 이 첫 성공에 멈추지 않고 황금에 대한 꿈과 이사벨 여왕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몇 차례 항해를 더 나아간다.
<콜럼버스의 네번째 항해 경로>
첫 항해를 나름 성공적으로 마친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뿐 아니라 많은 귀족들에게도 큰 인정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유럽사람들은 콜럼버스가 알려온 이 새로운 미지의 땅을 '신세계'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그를 '신세계 부왕'이라 부르는 등 콜럼버스는 한 번의 항해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콜럼버스의 달걀 일화
1차 항해 뒤 2차 항해를 준비하는 콜럼버스에게 그 유명한 달걀 일화가 일어난다.
한 신부가 콜럼버스를 만찬해 초대 했는데 만찬에 있던 귀족이 콜럼버스에게 "당신은 운이 좋아 신세계를 발견한 것이며 언젠가는 스페인 누군가가 신세계를 발견했을 것이오"라며 시비를 건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무엇인가 보여주겠다며 식탁에 있는 달걀을 집어 들어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달걀을 식탁 위에 세워 보시오"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자 만찬에 있던 귀족들은 "그런 것 쯤이야 문제 없지"라며 달걀을 세워보려 했지만 자꾸 쓰러지는 달걀을 세울 수 없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내가 해 보겠소. 내가 하는 방법을 잘 보시오." 콜럼버스는 달걀을 식탁 모서리에 '탁'하고 치더니, 찌그러진 쪽을 밑으로 하여 달걀을 세웠다. 그러자 신부와 귀족들은 "그렇게 하면 누구인들 달걀을 못세우겠소" 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을 누구도 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항로의 발견도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한번 알고 나면 나머지는 흉내만 내면 되겠죠." 라고 말하며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자신에 대한 시기심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신세계 땅을 밟은 콜럼버스>
|콜럼버스의 두번쨰 항해
1493년 9월 25일 새벽, 콜럼버스가 이끄는 탐헌 선대는 다시 한 번 신세계를 향하여 닻을 올린다. 그런데 이때는 첫 항해와는 달리 배만 17척에다가 대원 수가 1천 5백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대선단이었는데, 이는 첫 항해에서 희망을 본 사람들이 너도 나도 콜럼버스의 항해에 지원을 했기 때문이었다.
두달 후 첫 항해와는 평탄하게 콜럼버스는 다시 새로운 섬을 발견하는데 콜럼버스는 이 섬을 일요일에 발견했다 하여 스페인어로 일요일을 뜻하는 '도미니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윽고 콜롬버스는 자신이 첫 항해 때 식민지를 세우고 자신의 선원 36명을 놓고 온 히스파니올라섬을 찾았다. 그런데 그가 떠난 뒤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은 그의 대원들은 모두 죽어있었고 마을 역시 온통 잿더미로 변했다.
이에 콜럼버스는 안타까움과 좌절을 했지만 그는 다시 탐험을 시작해 데 그라샹 하구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고 집과 총독 관사, 교회, 창고등을 지어 '이사벨라'라고 도시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후 열대기후와 전염병, 배고픔 등을 이기지 못한 대원들의 불만이 극심해지자 콜럼버스는 항해를 계속 했고 마침내 황금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때 콜럼버스와 그 대원들은 인디언의 강제 노동을 통한 황금채취에 나섰고 그에 비해서도 황금 채취가 시원치 않자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등의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여튼 적은 황금량에 실망한 대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고 콜럼버스는 하는 수 없이 일부 병자들과 본국으로 가기 희망하는 사람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낸다.
<자메이카에 세워진 콜럼버스 동상>
|새로운 땅들을 발견하다!
많은 대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낸 뒤 콜럼버스는 황금을 찾기 위해 탐험을 멈추지 않았고 콜럼버스는 지금의 쿠바 남쪽 자메이카 섬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자메이카에서도 황금을 발견하지 못한 콜럼버스는 이사벨라시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 없는 항해 결과와 콜럼버스에 대한 여러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콜럼버스는 많은 사람들의 모함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모함에 말리며 2차 항해를 끝나고 1496년 본국에 돌아온 콜럼버스를 이사벨 여왕은 끝까지 믿어 주었고 2년 후인 1498년 콜럼버스는 세 번째 탐험을 시작한다. 콜럼버스는 이번에는 항해를 할 대원들뿐 아니라 300명의 이민자도 동반하고 다시 이사벨라를 찾았다. 이사벨라에서 정비를 끝마친 콜럼버스는 다시 탐험을 시작 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또 다른 식민지를 건설한다.
이후 콜럼버스는 세번째 항해에서 지금의 트리니다니 토바고등 새로운 땅을 찾았는데 그들이 원하는 황금은 없었다. 때문에 다시 스페인 본국에서는 콜럼버스에 대한 비난이 심해졌고 처음부터 콜럼버스를 믿고 잇떤 이사벨 여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콜럼버스를 본국에 강제 송환 했다.
|네번째 항해 그리고 죽음
본국으로 송환 오는 동안 끊임 없이 고생한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돌아와 이사벨 여왕으로 만나게 된다. 비록 송환을 명령한 이사벨 여왕이었지만 콜럼버스의 행색과 그 동안의 콜럼버스가 세운 공 그리고 자신에 대한 충성을 생각하며 송환을 명령한 자신을 자책했고 다시 콜럼버스에게 기회를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콜럼버스에게 네번째 항해를 허락하고 1502년 5월 11일 콜럼버스는 배를 이끌고 다시 그가 인도로 알고 있는 아메리카로 향한다.
총 네척을 이끌고 항해를 시작한 콜럼버스의 함대에게 폭풍우로 인해 두척이 침몰하고 4개월만에 겨우 자메이카 땅에 도착했는데 이번 항해에서는 파나마와 온두라스 등을 발견했다고는 전해지나 역시 기대 이상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에스파냐로 돌아간다. 콜럼버스가 네번째 항해를 마쳤을 때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아무도 그를 환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영원한 후원자 이사벨라 여왕 역시 병으로 신음하고 있다가 1504년 11월 26일 죽고 만다.
이사벨 여왕의 죽음은 콜럼버스에게는 희망이 사라진 것이었고 이사벨 여왕의 남편이자 이제까지 함께 콜럼버스의 항해를 도왔던 페르난도 국왕마저 그를 외면하자 콜럼버스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고 1506년 3월 20일 마침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1542년 콜럼버스의 시신은 그의 공로를 인정한 사람들에 의해 히스파니올라섬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에 묻혔다.
<히스파니올라 산토도밍고에 위치한 콜럼버스 동상>
콜럼버스의 모험은 그 목적이 어쨋듯이 당시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발견이었고 이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은 분명하다. 특히 세계의 큰 축인 아메리카 대륙이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 가치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물론 콜럼버스는 죽을때까지 그가 발견한 땅이 인도라고 알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자신에 대한 부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때문에 당시 살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화 하는데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 또한 면하기 어렵다. 특히 이러한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학살은 추후 수백년간 이어지는 인류 역사의 추악한 노예문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극소수만 살아남게 했다는 점은 아쉬운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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