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조선 첫번째 중전 신덕왕후 강씨 그리고 정릉

윤여시 2019. 10. 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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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첫번째 중전 신덕왕후 강씨 그리고 정릉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 조선의 기틀을 닦는 태종이 되기까지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자신의 배다른 아우인 방석, 방번도 있었는데 그들의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와 방석 방번은 왜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해야 했는지 알아보자 


<드라마 정도전 신덕왕후강씨>

 

|신덕왕후와 이성계의 관계


신덕왕후가 태어난 집안은 고려 시대 명문가문 중 하나로 고려 왕실과도 따지고 보면 연이 있는 권문세족 집안이었다. 당시 신덕왕후의 숙부였던 강윤충이 이성계의 큰아버지인 이자흥의 사위가 되면서 집안이 알게 되어 연이 닿아 이성계와 혼인을 할 수 있었다. 이성계와는 나이차이가 21살이나 날 정도로 나이차이가 많이 났으나 당시 고려를 대표하는 장수였기에 크게 문제 된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사실 신덕왕후 강씨가 이성계와 결혼할 때 만해도 우리가 잘아는 이방우, 이방과, 이방원 등 무시무시한 아들들을 두고 있는 첫 부인 한씨가 있었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그들과 배다른 형제 방석과 방번을 낳으며 이성계와 한씨의 자녀들과도 잘 지내었으며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도 나름 역할을 한 듯 보인다.


|조선 건국에서 등장하는 신덕왕후 강씨의 이름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이후 공양왕과 정몽주와 대립할 때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 떨어져 큰 부상을 당했고 정몽주는 이를 놓치지 않고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중심 세력들을 옥에 가두고 이성계를 죽일 계획까지 세웠던 적이 있었다. 이때 신덕왕후 강씨는 이성계의 첫 부인인 한씨가 죽어 묘를 지키며 살던 이방원을 급히 불러내어 해주로 가게 하여 이성계를 지키게 하였다.


또한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하자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노한 이방원을 향한 이성계의 분노 역시 신덕왕후 강씨가 감싸주었는데 이는 신덕왕후 강씨가 일정 부분에서는 이방원처럼 야심도 있었던 것을 반증하는 모습이기도 하며 이때까지만 해도 이방원과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여튼 1392년 8월 25일 조선 개국 이후 죽은 한씨 대신 그녀는 조선의 첫 중전으로 신덕왕후 강씨로 봉해진다.


<드라마 육룡이나르샤 신덕왕후강씨>


|조선 건국이후 신덕왕후 강씨의 행적과 죽음


분명 신덕왕후 강씨는 물론 그의 아이였던 방석, 방번과 첫째부인 한씨의 자녀들 사이에서는 조선 건국 이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선건국 이후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의 자녀들과 신덕왕후 강씨의 틈이 벌어진 것은 바로 이성계를 잇는 다음 왕위자리 때문이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이 낳은 방석, 방번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정도전과 정치적 연합을 통해 자신의 아들 방석 의안대군을 세자에 책봉시키게 된다. 이로 인해 특히나 야망이 컸으며 정몽주 등을 죽이며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 정안대군 이방원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 했으나 결국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와 정도전의 말을 듣고 아들 방석을 세자로 지명한다. 


그러나 1396년 9월 15일 몸이 좋지 않았던 신덕왕후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고 태조는 슬퍼하며 그녀의 무덤 옆에 매일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아예 1년간 공사를 거쳐 흥천사를 지어주었다. 태조는 흥천사가 완공되자마자 자주 능과 절을 둘러 보았는데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극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튼 신덕왕후가 죽은뒤에도 세자 방석과, 방번들과 자주 시간을 보내며 신덕왕후의 능에 재를 올리는 종소리가 나야 잠에 들 정도였으니 어쩌면 방석이 세자자리에 올라선 것도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이성계의 사랑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북구 정릉>


|신덕왕후 강씨와 정릉의 슬픈 일화


신덕왕후가 죽은지 2년이 지난 1398년 이방원의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정도전은 물론 의안대군 방석, 방번 형제는 모두 제거 되었으며 그녀의 사위도 살해 당해 그녀의 딸이었던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는 비참함을 겪게 된다.  


이방원의 분노는 그녀의 소생을 죽이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얼금고령(서자 출신은 서얼 금고령은 조선 시대 서자들에 대한 관직을 제한한 규정), 적서차별(서자출신들은 적자에 차별을 받게 됨)제도로 이어져 이후 조선 사회의 모든 서자들의 슬픈 눈물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이방원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파괴하고 묘를 이전하도록 지시하였는데 그 이전에 먼저 태조 이성계가 죽자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의 어머니 한씨를 신의왕후로 올렸다. 태조가 가까이 두기 위해 정동에 마련했던 신덕왕후 능 정릉은 당시 경기도 양주 지역이었던 지금의 서울 성북구로 이장하게 되었고 묘를 완전히 파괴하고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청계천이 범람하여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써 백성들이 밝고 지나가게 하였다. 이것만 봐도 이방원이 얼마나 신덕왕후 강씨를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기록에 의하면 태종 이방원은 신하들에게 강씨와 성비 원씨(誠妃元氏)가 계모인가 하는 문제를 물었으며 세종 즉위년부터는 정릉의 제사는 나라에서는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마땅하지 않다하여 친척들로 하여금 맡아 하도록 하였다. 


여튼 이후로 지금의 성북구 정릉에 신덕왕후 강씨의 묘가 이장되게 되었으니 죽음 이후 그녀가 얼마나 수모를 겪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현종 대에 이르러 왕비로 복위되고 그녀의 신주가 종묘에 들어왔긴 했으나 조선 첫번째 왕후 치고는 너무나 비참한 대우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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