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꺼져가는 고려의 마지막 불꽃 공민왕 최후

윤여시 2016. 1. 1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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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고려의 마지막 불꽃 공민왕 최후


고려왕조의 500년사 중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공민왕만큼 많은 이야기를 낳은 왕도 없을 것이다. 무너져가는 고려의 끝에서 원대한 꿈을 실현하려 했던 공민왕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고려 제 31대 왕 공민왕>


|공민왕 출생 가계도


공민왕은 27대 충숙왕의 차남으로 MBC드라마 기황후에서 주진모가 맡았던 충혜왕의 동복 아우이며 몽고식 이름은 백안첩목아다. 그는 1330년에 태어났는데 1341년 원나라 순제(드라마 기황후에서 지창욱이 맡았던 왕)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때부터 원나라 수도 연경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할만큼 국권이 없었으므로 고려의 왕자들은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원나라로 가서 살아야 했다.)


사실 그는 충숙왕의 장남인 충혜왕의 뒤를 이어야 했으나 1344년 조카 충목왕이 즉위하며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348년 12월 충목왕이 사망하면서 많은 신하들이 공민왕을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원나라가 충정왕을 세우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1351년 충정왕이 나이가 어려 정치가 흔들리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원 순제가 1351년 충정왕을 폐하고 공민왕을 제 31대 왕에 봉했으니 그의 나이 22세였다. 


<고려 제 31대 왕 공민왕 가계도>


|공민왕 개혁정책을 펴다


공민왕은 연경에 있떤 10년 동안 원나라 내부의 끊임 없는 반란과 국력이 몰락해감을 미리 알았으며 그나마 남은 국력도 홍건적 반란 이후 거의 힘을 잃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즉위를 함과 동시에 원나라가 강요한 당시 변발을 풀어 헤치고 강력한 반원정책을 펼칠 것을 공표 하였다.


그러나 이전에 앞서 고려의 상황도 정치의 불안정, 왜구의 잦은 출몰로 인해 민생이 피혜해져 있음을 알고 공민왕은 안으로는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뜻을 펼치게 된다. 그는 왕위에 오른 바로 직후였던 1351년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서 당시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으며 당시 고려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토지와 노비 제도를 개혁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게 된다. 


공민왕은 또한 왕권강화를 위해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의 모든 일에 대하여 5일에 한번씩 계를 올려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했는데 이는 무신정권 이후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원나라의 영향력에마저 밀리면서 결재만 해야 했던 왕권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혁신적인 조치였다. 


즉위하자마자 바로 이어진 공민왕의 무서울듯한 개혁속에서 정치토론장인 서연을 다시 열면서 그 빛을 발했는데 서연에서 공민왕은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 사기, 예법을 강의하게 하며 그들의 재산, 억울한 죄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만들어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자신에게 서연에서 나오는 모든 보고를 할 것을 명령한다. 


 <SBS 드라마 신의 공민왕 역 류덕환>


|공민왕 반원정책을 펴다 


공민왕은 내부의 개혁정책과 함께 반원정책을 함께 펴기 시작한다. 그는 1352년 고려의 옛풍속을 되찾기 위해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고 풍속을 금지시켰고 1356년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문종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하였다. 또한 내정간섭을 일삼아오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당시 고려사람이었지만 원나라 순제의 두번째 비로 오른 기왕후를 믿고 설치던 오빠 기철과 원나라 태자에게 자신의 딸을 바쳐 친원파의 대표주자격이었던 권겸을 연회를 빌미로 초청하여 그자리에서 숙청하였다. (MBC 드라마 기황후가 얼마나 잘못된 역사를 주제로 만들어진 사극인지 알 수 있는 부분> 


또한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에게 명령하여 원나라 복속 이후 1백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민왕의 반원정책에는 조일신, 기철, 최유 등 끊임없는 권문세족의 반란이 잇따랐다. 



 <노숙공주와 공민왕 >


|끊임 없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1356년 무렵 공민왕은 승려 보우의 선 사상에 몰입하여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기도 하였으며 이는 태조 왕건의 유지를 받들며 당시 가파르게 크고 있던 사대부 유학자들을 견제하는 의도가 있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가운데 호시탐탐 압록강을 넓혀 북진정책에 대한 뜻을 내비치고 있었는데 원나라 역시 이사실을 알고 고려의 절일사 김구년을 요양성에 가두고 80만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를 정복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오히려 서북면 일대의 경비를 강화하고 도성에 외성을 세우는 한편 한성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는 등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1356년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을 함락시키고 원나라에 빼았겼던 함주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중국 하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홍건적이 원으로부터 도망치다 고려를 넘어오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원과 화해 하고 유대관계를 강화하였다. 


1359년 원에 도망쳐 만주에 자리 잡고 있던 모거경이 이끄는 4만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에 서경이 함락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다시 수복하였지만 홍건적은 해로를 통해 고려의 해안 지방을 습격한다. 


그리고 1361년 10월 반성, 사유, 관선생, 주원수가 이끄는 10만명의 홍건적이 침입하며 개경이 합락되자 공민왕은 경기도 광주를 거쳐 안동으로 피신을떠난다. 그러나 고려군 20만이 적장 관선생과 사유 등을 죽이고 개경을 회복하며 위기를 벗어났으나 개경의 궁성이 완전이 전소되고 각 도의 문화재와 사찰이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다시 쳐들어올 홍건적을 막아야 했던 고려는 반원정책을 포기하고 1361년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하였으며 관제도 개혁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특히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 무장들의 힘을 강화시켰으며 공민왕 초기에 힘들게 복구 했던 문신들의 중용정책 역시 퇴조되어간다. 


|공민왕을 위협하는 끊임없는 위기와 노국공주


공민왕의 위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홍건적의 피해가 미처 복구되기도 전인 1363년 찬성사 김용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공민왕의 환궁도중 일어난 사건이라 공민왕의 측근인 안도적 왕자문, 김한룡, 우정승, 홍언박 등이 목숨을 잃었고 공민왕 자신 역시 살해 당할뻔 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이때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달려온 최영, 오인택 등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이때부터 최영, 오인택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개경 수복에 공이 컸던 이성계 역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자신의 오빠 기철을 죽인 것에 앙심을 품은 기황후의 사주를 받은 최유가 덕흥군 왕혜를 받들고 압록강을 건나 의주를 함락하는 일도 벌어졌는데 이때 최영, 이성계 등이 활약하며 최유는 퇴각하였다가 원나라 군사에 의해 포박되어 고려로 압송 처형되었다. 


또한 쉴틈 없이 남해안과 경상도 일대에 왜구가 침입하여 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는데 1365년에 공민왕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바로 만삭의 몸이던 왕비 노국공주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인데 이는 힘들어도 꾸역꾸역 버티던 공민왕의 정신줄을 놓게 만들어버렸고 당시 자신의 옆에 있던 왕사 신돈에게 정권을 내맡겨 신하들을 견제한 후 오직 노국공주만을 위해 불교에 전념하였다. 


  <신돈>


|신돈의 권세속에서 


공민왕이 신돈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정권을 장악해가자 권문세족들은 이에 반발하였는데 신돈은 이 같은 반발에 오인택, 조회고, 김원명 같은 공신들을 유배보내버리고 그들의 가족을 노비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신돈의 힘이 날로 강해지자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를 비롯한 왕실세력과 신하들은 걱정을 했지만 공민왕은 오히려 신돈을 믿었고 그 비판세력을 앞장서서 척결했다. 하지만 1370년에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보낸 친서에 공민왕을 고려국왕이라 칭하고 신돈을 상국으로 부를 만큼 신돈의 위세는 대단해졌고 공민왕은 마침내 왕권에까지 침범하는 신돈을 보며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 신돈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부의랑 이인이 1371년 7월 익명으로 신돈의 역모를 고변하자 공민왕은 기현, 최사원, 정구한, 진유검 등 신돈 세력을 국문하여 처단하고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시켰다가 사형시켰다. 6년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신돈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공민왕 무너지다, 공민왕 최후


그러나 공민왕 역시 신돈을 제거한 후 술에 취해 살거나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미행을 나갔으며 변태적인 행동을 했는데 젊고 예쁜 시녀들을 방안으로 불러들이고 귀족의 아들들로 만들어진 자체위 소속 김흥경, 홍륜 등과 음행을 하게 만들고 자신은 방문틈으로 지켜보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영화 쌍화점의 배경이 된다. 주진모가 공민왕 홍륜이 조인성)

 

또 마음이 통하면 홍륜등을 침실로 불러들여 동성애를 했고 후계자를 만들기 위하여 홍륜과 한안 등을 시켜 왕비를 강간하게 하여 그들 사이에 자식이 생기면 자신의 아이로 삼으려 한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던 1374년 9월 공민왕은 내시 최만생으로부터 자신의 익비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공민왕은 익비의 자식을 완전히 자기 자식으로 만들고자 최만생에게 왕비와 같이 잔 홍륜과 그의 무리를 죽이라 명한다. 


하지만 최만생은 홍륜무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고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과 공모하여 공민왕을 죽일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날밤 마침내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있던 공민왕을 죽이게 되니 이로써 공민왕 허무한 최후를 맞게되고 즉위 23년만인 45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공민왕을 죽인 최만생과 홍륜 일당 역시 그 다음날 내시 이강달과 경복흥, 이인임에 의해 모두 체포되어 죽고 유배당하니 이때부터 정권을 잡은 이인임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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