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단종을 지켜달 호랑이 김종서 장군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13. 9. 2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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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김종서 장군 그는 누구인가?

영화 <관상>이나 드라마 <공주의 남자> 혹은 기타의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조선의 충신이자 어린 왕을 지키기 위한 신하로 나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는 호랑이 장군 김종서 그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 속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일까? 과연 그는 호랑이 장수였고 그는 무엇을 했기에 문종이 아들 단종을 김종서에게 부탁했을까? 한번 알아보자.

영화 관상에서 김종서 역할을 맡은 백윤식

|김종서는 천재였다

김종서 그는 천재였다. 사실 많은 작품중에서 그리고 6진을 개척한 역사속에서 그를 호랑이라 표현하면서 장군(무관) 출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사실 16세때 과거에 급제하며 관직에 오른 문신이자 조선 시대 천재중 한명이었다. 지금의 나이로 중학교 3학년때 당시 국가 최고의 고시를 통과하고 관직에 오른 것이니 그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가?

 

김종서 장군은 태종5년 관직에 오른 이후에도 역시 문과 관직을 역임하며 그의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 역사에 절대 잊혀져서는 안되는 6진을 개척한 것은 함길도절제사에 임명 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그가 무인이라 오해 아닌 오해를 받았고 호랑이 대감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김종서가 개척한 6진

|김종서의 6진 개척

6진은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 종성, 경원, 부령, 회령, 경흥을 가리키는 지역으로 우리나라의 북쪽 끝이자 두만강 지역의 아주 중요한 영토였다. 김종서 장군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함길도 도관찰사에 임명되게 되는데, 장수가 아니였음에도 그가 가장 위험한 지역의 관찰사로 임명된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여진족의 수많은 부족들은 내분을 겪고 있었는데 이같은 정세를 읽은 세종대왕이 단순히 군사를 부리는 용맹한 장수들 보다는 지략 있고 당당한 김종서를 선택한것이다.

 

김종서는 세종대왕이 생각했던대로 정확하게 적의 내분을 이용하고 여진족을 밀어내 북방 개혁에 착수 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여진족의 수많은 화살이 그의 책상에 날아 왔음에도 눈 깜짝하지 않았고 그를 암살하기 위한 계책들에도 절대 굽히지 않고 6진을 개척해나갔다.

 

또한 그는 단순히 영토확장 뿐 아니라 6진에 백성을 이주시켜 지내게 했는데 여기서 그의 뛰어난 행정 능력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탁월한 행정가로서의 모습도 겸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김종서 역을 맡은 배우 이순재

|김종서 고려사절요도 편찬하다

그는 또한 세종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에게 건의해 고려 역사를 다시 써내려간 고려사절요 편찬을 제의하는데 당시 이전에 쓰여진 고려사의 경우 주제별로 편찬되 있어 읽기가 상당히 불편하였고 그는 날짜별로 된 편년체 역사서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주도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려 왕들의 일대를 쓰지 않고 그는 고려대 신하들을 중심으로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며 당시로서는 특이한 역사서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6진을 개척하고 고려사절요를 편찬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며 태종 때 부터 세종 문종에 이르기까지 강한 신임속에서 좌의정 까지 오르는 김종서 였지만 그의 최후는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계유정난 김종서의 최후

세종대왕의 맏아들 문종은 30년동안 세자로 지내다가 왕위를 물려 받은 후 2년만에 승하하게 된다. 여기서 문종은 자신의 야망 많던 동생 수양대군을 의식해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김종서 등을 앉혔으며 그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유언의 내용은 자신의 아들 어린 세자 단종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문종이 승하하자 어린 왕 단종을 대신에 고명대신들이 조정일을 하게 되는데, 이때 모두의 예상대로 야심 많던 수양대군 역시 자신의 세를 불리며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행동은 조정의 반응보다 훨씬 더 빨랐고 반란의 첫 타겟으로 김종서라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이자 반역을 성공하기 위한 제일 좋은 타겟을 잡았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 밤 그의 부하들과 함께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게 되고 당시 일흔의 김종서는 그의 맏아들 김승규와 함께 수양을 맞게 된다. 이에 수양은 자신이 직접 김종서에게 할말이 있다 전하며 김승규와 김종서를 떨어지게 했고 그의 수하에게 자신이 가져온 편지를 가져오라 했다.

지금의 세종시에 위치한 김종서 장군의 묘

 

그리고 그의 수하가 편지를 김종서에게 전함과 동시에 철퇴를 꺼내어 김종서의 머리를 치게 되고 김종서는 그자리에서 즉사하게 된다.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다. 이뿐 아니라 그의 맏아들 김승규 역시 그자리에서 칼로 내리치니 좌의정 가문이 억울하게 멸문 당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수양은 김종서를 치자마자 궁으로 달려가 어린 단종을 위협하며 "김종서가 역모를 일으켜 자신의 동생 안평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으니 "라고 단종에게 고하며 반역죄를 김종서에게 뒤집어 씌우게 된다. 이것이 계유정난이며 김종서 가문의 몰락이었다.

 

이후 300년만인 영조대에 이르러 김종서를 다시 복권시키면서 당시 단종을 위해 목숨 받친 사육신과 더불어 조선의 최고 충신으로 다시금 인정하게 된다. 이보다 앞서 세조 역시 자신의 왕위에 오르고 왕권이 안정에 이르자 김종서에 대한 일을 참회했다고 하니 그의 품성과 절개는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억울한 최후를 맞이해서인지.. 아니면 어린 왕에 대한 슬픈 이야기에 그가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6진 개척 김종서. 호랑이 대감이자 그 끝없는 절개는 후세에도 길이 이야기가 되고 교훈이되어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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