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남한산성 주화파의 선두주자, 냉정한 현실주의자 조선 최명길!

윤여시 2019. 10. 2.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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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주화파의 선두주자, 냉정한 현실주의자 조선 최명길!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 금방이라도 조선을 멸망시킬 듯 기세 등등한 청나라의 군대 앞에서 일단 항복을 하고 외교로 풀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야한다는 척화파의 김상헌의 대결이 참으로 볼만하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자는 김상헌 보다 우선 항복을 하자고 했던 주화파 최명길은 후세의 많은 비난을 받게 되는데, 그 때문일까 그의 천재적인 외교 능력에 비해 저평가 받은 것이 사실이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조선 최명길 그는 누구인가?

 

최명길 초상화 

 |최명길 - 유년시절부터 병자호란 전까지 

최명길은 오성과한음으로 유명한 명재상 이항복의 제자로서 유년시절부터 유난히 영특한 머리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그는 놀랍게도 스무살 되던 1605년 한해에 소과와 대과를 모두 급제한 인물로 천재임을 입증해 내었다. 하지만 당시 광해군 시절 북인 세력의 권력독점으로 인해 억울하게 병조좌랑에서 삭직당하고 방황의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이항복 밑에서 같이 수학했던 이시백의 아버지이자 당시 서인 강경파였던 이귀와 연이 닿으며 인조반정에 참여하였는데 반정 대부분의 계획이 최명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인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 1등 공신으로 봉해지고 1년 만에 이조참판까지 오르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의 삶을 살게 된다. 

 

영화 남한산성 최명길역의 이병헌

|최명길 - 정묘호란, 병자호란 발발하다!

인조반정 이후 1년도 되지 않아 공신반열에 불만을 품고 터져나온 이괄의 반란으로 인조는 호남으로 파천하게 되는데 최명길은 총독부사로 이괄의난을 제압하고 조정이 안정되자 그는 내정 개혁안을 쏟아내며 민생 이곳저곳을 돌보기 시작한다. 

또한 외교에 있어서도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존중해 당시 망해가는 명나라와 화친해야 한다는 인조와 조정신하들과는 다른 주화론을 주장한다. 하지만 인조와 정권을 잡은 신하들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외교를 했고 때문에 1627년 후금이 쳐들어오는 정묘호란이 터지고만다. 

 

정묘호란으로 순식간에 북방의 요충지들이 함락되고 인조는 또다시 강화도로 도망가는 굴욕을 맛보게 되는데 최명길은 
주화론을 내세우며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 짓게된다. 그러나 최명길의 외교에 대해 굴욕적이라면서 척화파들은 최명길의 행동을 비난하며 정신을 못차리는 것은 여전했다.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청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자처하며 조선에 형제의 관계가 아닌 군신관계를 요구하게 된다. 이에 조선에서는 그 어느때보다 척화론에 대한 주장이 강해지면서 오랑캐인 후금에게 절대 항복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된다.

 

하지만 최명길만큼은 '압록강이 얼면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인조가 미리 강화도로 피신해야 한다는 간언을 하지만 척화파에게 간신 취급 받으며 그의 의견은 묵살당한다. 그리고 마침내 1636년 겨울, 압록강을 넘은 청나라군은 6일만에 서울에 이르렀고 강화도로 가는길 마저 차단당하며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피신하지도 못한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마저도 최명길이 사신을 자청해 청군을 찾아가며 벌었던 시간이었다. 여튼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론자들과 최명길은 대립하며 2달 남짓 기간동안 무수한 논쟁을 펼쳐간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근왕군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자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이때 최명길은 온갖 욕을 먹으면서 항복 문서를 작성했고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협상을 하였는데 척화론자들은 최명길을 나라를 판 간신이라며 끝없는 비하를 한다.

 

특히 김상헌은 최명길의 항복 문서를 찢고 대성통곡하며 인조에게 울부짖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김상헌이 최명길을 꾸짖자 최명길은 김상헌의 마음을 이해한다하며 찢어진 항복문서를 다시 주워 모았다고 한다.

 

|최명길 - 병자호란 이후의 삶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 좌의정 그리고 영의정에 오르게 되는데 전쟁 후, 피폐해진 나라를 살피고 대청 외교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다. 특히 청나라에 무참히 끌려갔던 환향녀들에 대한 이혼을 금지해야한다고 말하지만, 명분만 내세우는 사대부들에게 욕 먹기 딱 좋은 말이었다. 

또한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는데 조선의 군사를 내어달라고 말하자 최명길은 직접 청태종을 찾아가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병자호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나라 때문에 도울 수 없다고 청태종에게 직접 대면 보고를 한다. 이후 최명길은 마치 광해군처럼 망해가는 명나라에도 외교 문서를 비밀리에 전달하고 조선의 상황을 알리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행동이 이계라는 자의 밀고로 청나라에 발각되면서 최명길은 1642년 명과 내통한 죄로 청국에 소환 당한다. 

청나라 용골대에게 심문을 받게 된 최명길은 인조는 모르는 일이며 오직 자기와 임경업 장군이 벌인 일이라며 왕을 끝까지 감쌌다고 한다. 그리고 최명길이 청나라의 감옥인 북관에서 남관으로 이관되면서 이곳에 수감되어 있던 김상헌을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를 오해를 풀며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1645년, 60세의 나이로 3년만에 청나라에서 풀려 조선으로 돌아온 최명길은 2년 후인 1647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같은 해, 소과와 대과를 모두 합격한 천재에서 허울 좋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하며, 파란만장한 조선의 역사와 함께 살았던 최명길, 그의 평가를 두고는 말이 많지만 그의 진심만은 영원히 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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