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승리의 화신, 고려 초기 명장 유금필 그는 누구인가?후삼국시대 승리의 화신, 고려 초기 명장 유금필 그는 누구인가?

Posted at 2019. 10. 14. 21:28 | Posted in 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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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승리의 화신, 고려 초기 명장 유금필 그는 누구인가?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하는 법이라고 했는가. 천년사직의 통일신라가 흔들리는 틈을타 왕건, 궁예, 견훤 등 난세의 영웅이 등장한 가운데 후삼국시대가 막이 오르게 된다. 이 후삼국시대는 태조 왕건의 고려가 통일을 만들어내기까지 끝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때 끝없이 펼쳐지는 전쟁속에서 승리를 가져오며 왕건이 통일을 이루는데 가장 큰공을 세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고려초 명장 유금필이다. 유금필 그는 과연 누구일까?

|유금필 - 역사에 등장하기까지  

태조왕건에서 등장한 유금필

평주 지금의 평산 출신인 유금필은 언제 태어났는지 또 언제부터 무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사에서도 태조 왕건의 고려 개국 이전의 유금필 기록은 사실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를 세웠을 때도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것으로 봐서는 궁예의 개국 초기부터 이미 장수로 활동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다만, 개국공신 대열에 유금필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개국 시의 조정에도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왕건의 역성혁명 당시 유금필이 어떤 역할을 했을지는 의문이라 할 수 있겠다. 

 

유금필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바로 고려초 골암성 전투때부터이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여기에 북방인 지금의 안변군 지역의 골암성에서는 여진족들이 고려인들을 포로로 잡아가며 위협적인 존재로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태조왕건은 북방의 여진족을 잠재우기 위해 적임자를 찾는일이 쉽지 않았다. 

 

 

그때, 왕건은 유금필의 명성을 듣고 유금필을 불러들였고 병력 3천을 내주며 골암성의 여진족을 잠재우라 시킨다. 이에 유금필은 병력 3천을 이끌고 골암성으로 가 주변 여진족 추장 3백여명을 불러 큰 잔치를 열어 그들을 달랬다. 그리고 그들이 술에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위협하여 복종을 강요했고 추장들은 겁에 질려 복종을 맹세한다. (사실 겁을 줬다기 보다는 잔치를 통한 회유와 은근한 협박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 대세다.)

 

유금필은 추장들이 복종을 맹세하자 남은 여진족 잔당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이에 남은 잔당들 역시 투항하니 그들의 숫자가 1천 500여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포로로 끌려간 고려인 3천명도 돌려 받는 공을 세워 이때부터 왕건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다. 

 

이후 유금필은 고려 북방에 머물며 평안을 되찾게 하니, 왕건은 이를 통해 후백제와의 싸움을 마음 놓고 준비할 수 있었다. 

|유금필 - 승리의 화신이 되기 시작하다. - 고창전투

유금필의 능력이 들어난 것은 925년 연산진(충북 청원) 전투때부터이다. 유금필은 당시 정서대장군으로 연산진을 공격하였는데, 사실 이땅은 원래 궁예시절 태봉의 땅이었으나 왕건이 혁명을 일으키자 공주, 홍성, 예산과 함께 후백제로 투항한 곳이었다. 이 땅은 고려의 군사적 요충지인 청주를 위협하고 있는 땅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왕건으로서는 되찾아야 하는 땅이었다. 

 

여튼 연산진을 공격해 들어간 유금필은 그곳 장수 길환을 죽이고 다시 임존군(충남 예산)을 공격하여 백제군 3천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승리를 만들었다. 또한 10월 조물군(경북 안동) 싸움에서는 왕건과 견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전투를 치렀는데, 임존성을 무너뜨린 유금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세하여 고려군의 기세를 올려놓았다.

 

이에 견훤이 상황의 불리함을 알고 고려에 화친을 제의하게 만든다. 유금필은 이때 견훤의 화친을 거절하고 공격을 하려 했으나 왕건이 이를 받아드리면서 상황은 일단락 된다. 또한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에 완패하며 고려의 기세가 많이 약해졌던 928년, 백제장군 김훤, 애식, 한장 등이 삼년산성에서 대패한 왕건을 쫒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금필은 병사 3천을 이끌고 나가 그들을 대파하며 왕건을 구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930년, 후삼국의 판도를 고려쪽으로 돌려놓았던 고창(안동)전투에서 유금필은 홍유와 공훤 등이 소극적이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하게 전투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밀어붙여 백제군 8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만들어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유금필을 치하하며 "오늘의 승전은 오직 그대의 힘이다"라는 찬사를 할정도 였으니 유금필을 향한 왕건의 총애가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유금필 - 유배를 가서도 승리를 쟁취한다 - 유배와 복귀

왕건의 총애와 연전연승을 기록하던 유금필도 시련은 있었다. 931년 잘나가는 그를 시기한 조정의 무리들 때문에 곡도(백령도)로 유금필은 유배된다. 그런데 바로 이때 견훤이 해군장군 상애와 상귀를 동원하여 고려의 수도 개성을 유린하였고 저산도 목장의 군마와 평안북도 용천을 습격하여 고려의 후방을 혼란으로 몰아 넣는다. 왕건은 이에 대광만세 장군을 시켜 후백제군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이소식을 들은 유금필이 곡도와 포을도의 장정을 모아 군대를 편성하고 백제 해군을 공략하니, 왕건이 "참소하는 말만 믿고 어진 사람을 내쫒은 것은 나의 불찰이다"라고 하며 유배에서 풀어주었다. 이후 933년, 정남대장군에 임명된 유금필은 다시 한 번 왕건의 명령을 받는다. 

 

왕건은 당시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대비토록 했는데 이미 신검이 이끄는 부대가 경주를 포위하며 신라가 위기에 빠졌고, 이를 구해달라는 명령이었다. 유금필은 이 명령을 받자마자 경주로 달려갔는데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면 기동력이 떨어지므로 별동대 80명만 끌고 경주로 향하는 놀라운 결단을 한다. 

 

경주 근처에 이르러 백제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금필은 "여기서 적을 만나면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 각자의 살 도리를 강구하라!" 그러자 별동대도 이에 화답하여 전의를 불살랐고 유금필과 80명의 별동대는 유금필이 온다는 소식에 움츠려든 백제의 저지선을 뚫고 경주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유금필은 경주에서 7일을 머무르며 후백제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왕건은 이에 크게 기뻐하며 유금필 같은 장수가 없도다라고 치하했더니 유금필이 말하길 "국가가 시급하면 자기 일신을 생각치 않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왜이렇게 치하를 하십니까?" 라는 명언을 날린다. 

|유금필 - 거듭되는 승리와 말년

유금필

934년 왕건이 운주전투에 임하기 위해 친히 전쟁에 나섰는데 견훤이 이를 막기 위해 갑사 5천명을 끌고 달려왔다. 견훤은 자신의 군세가 고려만 못하다 생각하여 다시 화친을 요청하였고, 왕건이 휘화 장수들과 함께 이 일을 논의하자 유금필은 싸워야 한다며 수천의 기병으로 후백제군을 공격한다. 이에 후백제군은 당황하니 유금필은 후백제군 3천명의 목을 베고 장군 상달과 최필을 비롯한 장수를 포로로 잡았다. 이 승리를 통해 공주 이북의 30여성을 얻는 쾌거를 올리게 된다.

또한 935년 그는 나주 회복전에도 나서는데, 935년 3월 견훤의 장남 신검이 자신의 배다른 동생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한다. 그러자 왕건은 장군들에게 나주의 회복전을 명하는데, 사실 나주를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이 점령한 후 929년 후백제의 공격을 받아 나주를 거의 빼앗기다시피한다. 이를 왕건이 찾고자 한 것이다. 

이때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유금필을 추천하였고, 유금필은 본인이 이미 늙었으나 명령을 받겠다하고 나주로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나주의 상당부분을 다시 고려의 땅으로 귀속시키니 왕건이 유금필을 맞이하러 예성강까지 친히 나서 맞이했다. 그리고 이 나주를 통해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이 고려로 귀순할 수 있었으니, 이 역시 유금필의 공이 상당하다 할 수 있겠다.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고 그해 10월 경순왕이 신라를 들고 고려에 투항하였으며 936년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고려에 투항하자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킬 적기라 판단하고 총공격을 준비한다. 936년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 9만여명은 일선군(경북구미) 일이천에서 후백제 신검으의 군사를 맞게 되는데 유금필은 북방의 여러 부족 9,500명의 기병을 앞세워 참전하기도 한다. 

|유금필 - 한번도 패하지 않은 고려초 명장 잠들다. 

고려사는 유금필을 표현하길 "장군으로서 전략을 가졌으며 병사들에게는 신망을 얻었고 출정할 때마다 명령을 받으면 즉각 출발하였고 집에 들러 잔적도 없었다. 태조는 그가 개선할 때면 반드시 마중을 나가 위로하였고 시종일관 다른 장수들이 받지 못한 대우를 해주었다." 

 

941년 유금필은 눈을 감았지만 태사삼중대광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고 그의 딸은 왕건의 9번째 부인인 동양원부인이 되었다.  그는 고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태조가 죽기전에 유금필의 자손이 죄를 짓더라도 따지지말고 중용하라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놀라운 장수였는지 알법한 대목이다. 

또한 개성왕씨 90%를 차지하는 동양군파가 고려사의 효은태자를 파의 조상으로 삼고 있는데, 이 효은태자를 낳은 사람이 바로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유씨라고 알려져 있으니 대대손손 영광이 있다 하겠다.

 

이후 1456년, 조선에서 세운 무성묘에서는 신라, 고구려, 고려, 조선의 18명 장군을 배향했는데 이때 유금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그의 역사적인 명망에 비해 오히려 더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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