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장영실과는 달랐던 조순생 그는 누구이며 세종대왕은 왜 그랬을까?

윤여시 2019. 11. 23. 17:40
반응형

장영실과 한팀이지만 처벌을 피했던 조순생 그는 누구인가?

영화 천문이 개봉을 앞두고 있으면서 장영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장영실외 그와 함께했던 인물들 역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중 장영실과 함께 세종의 가마를 만들었고, 세종의 가마가 박살이 나면서 장영실은 처벌을 받았지만 이를 피한 인물이 한명 있었다. 바로 조순생이다. 조순생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2015/01/21 - [국사/조선] - 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조순생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한양 조씨를 본관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1등공신의 칭호를 받은 조인옥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살아 있을 때, "조인옥이 없었다면 어떻게 대업을 이루었겠는가?"라며 말할정도로 영향력이 깊은 집안이었다. 

거기다 아들 조뇌 역시 참은 비롯하여 도관찰사를 거쳐 지돈녕부사까지 역임한 인물이 었고 그 딸 그러니까 조순생의 누이 역시 태종 이방원의 간택후궁이기도 했다. 즉 조순생은 이른바 빵빵한 뒤가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조순생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영실과 함께 대호군이라는 직책을 달게 된다. 여기서 대호군은 궁궐에서 필요한 용품을 개발하고 제작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벼슬로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재 과학자 장영실에게는 최적의 직업이었지만 조순생에게는 그냥 거쳐가는 승진 코스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른바 가마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온천에 다녀오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럴때마다 왕을 호위하는 행렬이 쭉 이어져야 했다. 그리고 왕이 걸어다녔겠는가? 당연히 왕의 가마인 어가를 타고 다녔을 것인데, 이때 장영실과 조순생이 만들었던  신형 가마가 부러져 버린 것이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왕의 어가가 행차도중 박살 나면 어떻겠는가? 당연히 삼족을 멸할 중범죄였다. 이에 신하들은 들불같이 들고 일어나 장영실과 조순생을 비롯한 대호군 직책의 인물들을 참형에 처할 것을 건의한다. 

 

|세종대왕의 가마가 부서진 이후 조순생은? 

사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순생은 가마가 부서질 것 같다는 것을 알고도 장영실에게는 절대 가마는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말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때문에 조순생의 처벌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 되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이는 불경죄로써 불경죄에 연류되면 비록 작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면대상이 될 수 없으며 엄중히 징계해야 합니다. 가마의 제작 감독을 맡은 대호군 장영실은 곤장 100대를, 장영실에게 가마가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대호군 조순생은 곤장 80대를 쳐야합니다. 아울러 제작을 담당한 실무자들도 그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씩을 쳐야 합니다."
- 사헌부 & 의금부, 세종실록 96권, 1442년 4월 25일/27일

 

이에 세종대왕은 아끼던 장영실의 처벌에 대한 결정을 고민하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린다. 

 

"임금께서 대호군 장영실에게는 장형 100대를 80대로 낮춰주고, 선공직장 임효돈과 녹사 최효남에게는 80대를 70대로 낮춰주라 명하셨다. 그리고 조순생은 처벌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 세종실록 96권, 1442년 4월 27일

 

다시말해 장영실에게는 장형 80대를 다른 실무자에게도 역시 장형의 벌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유독 조순생은 처벌을 면했다. 어쩌면 가장 중한 불경죄인데도 말이다. 역사에서 세종대왕이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에 대해서는 단연 말이 많다. 세종대왕은 실록에서 조순생의 일은 신하들이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라며 조순생을 두둔하는 한편 장영실은 이 처벌을 받고 신기할 정도로 역사에서 그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순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순생은 이후에도 역사속에서 꽤 많이 등장한다. 먼저 마정(전국의 말관리를 전담하는 업무)을 잘해 임금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는 점과 바둑을 잘두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 바둑 덕분에 조순생의 벼슬이 점점 올라가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때문에 신하들은 세종뿐 아니라 문종에 이르기까지 조순생에 대해 끊임 없이 비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순생은 다른 재능이 없는데 다만 바둑으로 이름이 알려져 오래 관직을 맡겼으니 이는 실로 배우지 못하고 방술이 없는 소치였다." - 세종 109권, 1445년 7월 12일

"조순생등이 직위를 이용해 맘대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은 임금을 속인 죄로 사형에 처해도 부족할 것이며 이들이 이리 행동한 것 또한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사사로이 관직을 활용하였으니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 세종 123권, 1449년 3월 23일

한편 바둑을 통해 조순생은 바둑을 정말 좋아했던 세종대왕의 세번째 왕자인 안평대군과 친하며 여러번 신하들의 비난을 들었음에도 벼슬자리에 있다가, 문종이 죽고 단종을 몰아낸 세조의 계유정난 이후 안평대군과 바둑을 두며 친하게 지냈다 하여 안평대군 일파로 몰리게 되어 강원도 고성으로 유배된 후 교형에 쳐해졌으며 그 아내는 노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TIP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한 이유

장영실이 가마사건을 이후로 그 기록이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존재한다. 

 

1 ) 명나라와의 외교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

 

가마사건이 일어난 해는 1442년, 세종의 천문사업이 완료된 해는 1438년으로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천문팀이 필요 없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장영실이 만든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대를 허물라고 세종대왕이 명을 내린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간의대는 당시 경회루에서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간의대를 명나라 사신들에게는 보이지 않은 곳에 옮기라고 명한 것이다. 사실 당시 간의대를 비롯해 천문기구를 통해 데이터들을 이미 다 얻을 수 있었고 명나라 사신들이 오고가다 이를 보고 트집을 잡을까봐 세종대왕이 명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조선은 명나라의 달력에 의존해야 했는데,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우리의 하늘을 연구하여 우리나라만의 역법, 즉 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찾은 장수들이 세종대왕 때 만든 우리나라의 자체 달력을 발견할까봐 선조가 전전긍긍하며 이를 두려워하는 대목이 입증한다.  따라서 명나라와의 외교 마찰을 피하기 위해 천문 지식을 가지고 있던 장영실을 보호하고자 하는 세종대왕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2 ) 한글 창제를 하기 위함? 

 

가마사건이 일어난 다음해인 1443년 바로 한글이 창제된다, 해서 세종대왕은 장영실 대신에 한글을 선택했다는 설도 있다.

 

명나라는 우리나라가 달력 그리고 한글을 갖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고, 특히 한글은 더더욱 그랬다. 해서 달력사업과
한글을 힘께 가는 것은 외교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세종대왕의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때문에 세종대왕은 내쳐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설이 생겨난다. 

 


세종대왕과 장영실 그리고 조순생 과연 역사속의 진실은 무엇일지, 조선의 두 천재와 그들의 삶이 더욱 궁금해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