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정조가 사랑했던 여자, 의빈 성씨 성덕임 그녀는 누구일까?

윤여시 2021. 1. 1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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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사랑했던 여자, 의빈 성씨 성덕임 그녀는 누구일까?

2007년 정조의 일대기를 그리며 큰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이산>에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 의빈 성씨(한지민)가 이제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다시 돌아온다. 조선의 성군 정조가 두번이나 고백(?)했지만 이를 거절했던 의빈 성씨 성덕임, 궁녀에서 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의빈 성씨 과연 누구였을까?

 

<이산>에서 의빈성씨 역을 맡은 한지민

|의빈성씨 출생과 입궁

 

의빈성씨. 이름은 덕임이다. 그녀의 집안은 사실 보잘것 없는 집안이었다. 아버지 성윤우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였던 홍봉한의 청지기였다. 이후 그의 아버지 성윤우는 늦은 나이에 무관에 올라 경복궁 가위장(경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인연을 통해 아버지 성윤우는 자신의 딸 성덕임을 궁녀가 되길 권유하였고 이에 의빈 성씨가 1762년(영조38년)에 입궁하게 된다.    

의빈성씨가 어린나이에 입궁할 당시 그 어머니는 죽었고, 아버지마저 병을 앓고 있어서 집안은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때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의빈성씨를 딸처럼 키우며 돌봐주었다고 한다.   

 

|의빈성씨 정조의 마음을 거절하다

 

1766년(영조 42)에 정조가 세손일 때, 사실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으나, 의빈은 완곡히 거절하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지 못하여서 승은을 받을 수 없다"라고 거절 하였다.

 

당시 일개 궁녀가 세손의 명을 거절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으며 일개 궁녀가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것과 같기에 놀랄만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이후 1778년, 왕위에 오른 정조가 원빈 홍씨, 화빈 윤씨를 채택할 때 새 후궁을 받는 것을 정조가 꺼렸다고 전해진다.

 

이후 어쩔 수 없이 화빈이 간택된 이후 정조는 12년 전의 의빈 성씨를 잊지 못하고 다시 승은을 내리려 도전한다. 이에 의빈 성씨는 12년전과 마찬가지로 정조의 승은을 거절하였더니, 정조가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의빈 성씨의 하인에게 고초를 겪게 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시간이 지나, 1786년 의빈 성씨가 죽었을 때 정조는 자신이 직접 의빈 성씨의 묘지명을 쓰며 이미 1766년 자신의 첫 승은을 거절할 때부터 의빈 성씨를 후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하니, 당시로서는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야기이며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의 가계도

|의빈성씨의 자녀 출생

 

정조의 첫 째 승은을 입은지 2년 후인 1780년에 첫 째 아이를 임신했으나 유산하였고, 그 1년 뒤에도 둘 째 아이를 유산하였다. 그리고 1년 뒤인 1782년 드디어 아이를 얻게 되니 그가 바로 문효세자이다. 

 

이때 의빈 성씨가 아이를 잘 낳도록 혜경궁 홍씨가 직접 몸종을 보내어 돕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조의 후사가 없던지라 평소 딸처럼 아껴왔던 의빈성씨에 대한 고마움과 후사에 대한 바람이 혜경궁홍씨를 그 무엇보다 기쁘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빈성씨는 아들을 낳으며 정 5품에서 정 3품 소용으로 올랐다. 이후 문효세자 역시 태어난지 100일뒤, 바로 정조의 뒤를 이을 원자로 정해지니 의빈 성씨는 1783년에 마침내 정 1품으로 오르게 된다. 세자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녀의 빈호인 의빈 역시 정조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화목하며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졌으니 정조가 얼마나 기뻐했고 사랑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1784년 의빈성씨는 다시 한 번 옹주를 낳았는데, 정조는 너무나 기뻐했다고 전한다. 

 

|의빈성씨 자녀들의 죽음과 안타까움

 

의빈성씨와 정조는 이렇게 행복하게 영원히 살았을 것 같지만, 하늘이 질투했는지 의빈성씨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태어난 옹주가 1784년 5월에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이때 정조가, 자신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슬픔까지도 걱정한 것을 보아 왕실에 분명 크나큰 슬픔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2년 뒤인 1786년 5월, 정말 그 어떤것보다 소중했던 문효세자가 홍역을 앓다 죽게 되니, 비극이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한다. 

잇따른 자녀들의 죽음으로 인해 평소에도 마음이 약했던 의빈 성씨는 중병에 걸려 본궁으로 피접까지 떠났다가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때 정조는 자나깨나 의빈성씨를 걱정하여 직접 약을 달이는 것을 살피며 최선을 다해 의빈성씨의 병을 낫게 하려 노력했으나 문효세자가 죽은 지 4개월 후였던 1786년 9월 창덕궁에서 죽고만다. 이때 의빈성씨는 임신 9개월의 만삭의 몸이었으며 사인은 알 수 없다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다.

 

 

|의빈성씨 독살설

 

의빈 성씨가 몸이 약하고 잇따른 자녀들의 죽음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에도 많은 독살설을 불러왔다. 의빈 성씨보다 앞서 간택된 화빈 윤씨는 정조가 후궁 간택을 주저하던 시기 들어온 인물이었다. 정조가 워낙 의빈 성씨를 좋아했던지라 사실 화빈 윤씨가 있을 자리는 거의 없었다. 거기에다가 문효세자까지 태어났으니 화빈 윤씨의 입지는 좁아졌다. 

물론 화빈윤씨가 정조의 후사를 잇기 위해 삼간택을 통과하여 들어왔기 때문에 무품 빈이었고, 의빈성씨는 문효세자를 낳았음에도 정1품 빈이라 더 낮은 자리에 있었긴 했지만 정조의 마음을 가져가버린 의빈성씨이기에 자리의 높낮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에 화빈 윤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옹주 1명만을 낳자 화빈 윤씨가 설자리는 완전히 없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화빈은 의빈을 싫어하였으며 '방중술을 써서 세자를 낳았다느니', '당시 중전이었던 효의왕후를 질투하는 여자가 바로 의빈 이라느니' 소문이 나돌았는데 화빈이 낸 소문이란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1786년에는 의빈 성씨가 죽자 화빈이 독살한 것이며 정조가 화빈윤씨를 내쳤다라는 소문도 생길 정도로 둘의 사이는 안좋았다고 전해진다. (의빈 성씨 독살설은 <이재난고>에는 등장하나 <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되지 않음)

 

의빈성씨와 문효세자가 묻혀 있는 서삼릉

여튼 의빈성씨가 죽고 정조는 1등의 예로 그 장례를 치루려 했으나 그 해 흉년이 들고 앞서 죽은 문효세자의 장례 때 많은 비용을 쓴지라 예장을 거행하되 비용을 절감하여 진행했다. 의빈 성씨의 묘는 문효세자가 죽었던 효창원의 왼쪽 산등성이에 묘를 정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에 의빈묘와 효창원은 지금의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정조는 의빈이 죽고 그 무덤과 사당을 수차례 방문하다가 이후 1790년 순조가 태어난 이후로 방문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는 훗날 순조의 왕권을 위해서 정조가 참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조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의빈성씨의 죽음을 슬퍼하며 묘표와 묘지명(어제의빈묘표, 어제의빈치제제문)을 직접 지었으며 의빈성씨의 덕행을 기리는 문장을 직접 지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이를 통해서도 정조가 의빈 성씨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정조라는 조선 후기 성군의 사랑을 받았으며, 당시로서는 용납될 수도 이해도 안되는 두 번의 승은마저 거절한 의빈 성씨, 짧고 굵은 생을 마감한 의빈성씨의 온화한 성품과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사랑은 분명 조선 왕실 역사에서도 길이 기억될 지고지순한 사랑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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