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심복이라 불렸지만 허무하게 사라졌던 홍국영 그는 과연 누구인가?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시대의 수많은 이야기는 사극으로 만들어지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영조와 정조를 중심으로 하거나 정조가 사랑했던 성덕임이나 후궁들의 이야기 등으로 펼쳐지지만 유독 사극에서 정조의 측근으로 그리는 인물이 있다. 바로 홍국영이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덕로 홍국영의 출생
1748년에 태어난 홍국영은 당시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와 마찬가지로 풍산홍씨이다 자는 덕로다.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6대손이자 혜경궁홍씨와 11촌의 동문이다. 그러하니 정조와는 너무나 먼 친척인 12촌 관계라 할 수 있겠다.
홍국영의 배경이 왕실과도 연이 닿아 있지만 집안은 잘나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 홍낙춘은 관직을 얻지 못했던 양반으로 권세를 누리던 풍산홍씨에서 주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홍국영은 유독 얼굴이 예쁘장했다고 전해지는 기록이 많으며 노래와 시를 잘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그는 젋었을 때 주위 친구들에게 곧 잘 '천하 모든일을 주무를 것이다' 라며 말하고 다니며 야망을 가득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홍국영의 벼슬살이 - 정조와 가까워지다
1772년, 정시 문과에 급제한 홍국영은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는 사관으로 있을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를 정도로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영조가 이처럼 믿고 총애할 수 있던 것은 홍국영 그자체의 능력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가문 배경과 왕실과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튼 1774년 3월 동궁시강원 설서로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정조와 가까워진다. 정조가 이때 궁료들이 말한 것을을 모아 <현각법어>라는 책을 썼는데, 이때 대부분의 언행이 홍국영의 것이라 전한다.
<명의록>이라는 기록을 보면 이 시기 홍국영을 '세손의 오른 날개'라고 쓰기도 했다. 홍국영은 이 당시 당파에 속하거나 세력을 키우지 않고 정조에게 객관적으로 세상의 실상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정조 역시 한쪽으로 물들지 않은 홍국영에게 듣는 정보를 신뢰했다.
홍국영은 또한 당시 정조의 정적인 홍인한 정후겸의 일당에게서 정조를 보호하고 대리청정을 성사시키는 등 오직 정조만을 위해 일했다.
|정조의 집권 - 홍국영 실권을 잡다
1776년 3월 정조가 드디어 즉위를 한다. 이에 홍국영은 며칠 후 곧바로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지금의 비서실장인 도승지의 자리에 오른다. 파격 그자체였다. 여기에 궁의 훈련대장, 금위 대장을 맡게 하면서 지금의 경호실장의 역할까지 맡게 된다. 다시말해 홍국영을 통하지 않고는 정조에게 갈 수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조가 그를 얼마나 믿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정조의 집권 초기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했던 규장각 설립 후 최초의 직제학자리까지 맡았으니 그야말로 홍국영의 시대였다.
홍국영은 이 같은 실권을 앞세워 정조의 정적 홍인한, 정후겸 등을 숙청하고, 정조의 외척이었던 홍봉한 집안도 박살내었으며 정순왕후의 동생이자 경주김씨 가문의 중심이었던 김귀주의 세력도 무너트려버린다.
이같은 홍국영을 보고 노론 벽파의 수장 김종수는 '국영과 갈라서면 역적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홍국영 스스로 외척이되다
1778년 정조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러자 정순왕후가 후궁 간택을 명하였는데, 이때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이게 된다. 이때 칭호는 원빈 홍씨였는데, 정조의 중전인 효의왕후가 비록 왕자를 못 낳았다고 하나 으뜸 원(元)자를 쓴것도 대단했다. 하지만 원빈 홍씨는 궁에 온지 1년 만에 죽고 만다. 홍국영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권세를 더욱 공고히하게 위해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게하고 완풍군으로 고친다.
당시 완산이라 불렸던 왕실의 전주 이씨 본관의 '완'자와 자신의 본관인 풍산 홍씨의 풍을 넣어 완풍군으로 고치는 파격적인 행보로 정조의 후계를 잇게끔 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홍국영은 죽은 원빈홍씨가 효의왕후가 독살을 했을 수도 있다며 궁궐의 많은 사람들을 문초 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점차 왕실의 인물들과 정조 역시 홍국영에게 등 돌리기 시작한다.
|홍국영의 몰락
1779년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을 부른다. 이날은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만난 날이었다. 이때 홍국영은 자신을 향한 정조의 마음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홍국영은 바로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상소를 올린다. '조정일에 관여하면 하늘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사직 상소였다. 이에 정조는 홍국영에게 사직을 허락하며 말한다. '천년 동안 군주와 신하의 이러한 만남이 있었는가, 예로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지만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흑발의 봉조하가 있게 되었다'
여기서 봉조하는 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명예를 내린 직함이었다. 이 역시 은퇴하는 형식이었지만 결국 정조의 추방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그동안 홍국영을 신뢰했던 정조이기에 벌을 주기 보다는 은혜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홍국영이 벼슬을 떠난 후, 궁에 남아 있던 홍국영 일파는 홍국영 복직 상소를 올리는 등 노력했으나, 정조의 대리청정과 즉위에 공을 세운 서명선은 홍국영을 두둔하는 행위자들은 물론 홍국영까지도 탄핵을 한다. 이에 정조는 홍국영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홍국영도 유배 보내버린다. 원래는 봉조하 직함을 받고 도성에 있던 홍국영은 이러한 반대파들의 상소와 함께 가산을 몰수당하고 강릉으로 유배되고 만다.
이에 홍국영은 실의에 빠져 살다가 결국 강릉에서 3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이후 홍국경과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은 삭제되었고, 홍국영의 사람들에게 잇따라 반역죄가 적용되면서 홍국영이 쌓아 놓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만다. 여기에 홍국영은 죽어서 강릉 교동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고 강릉 종합 운동장으로 개발 되어 그 흔적도 사라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권력의 비참한 말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삶을 홍국영이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여튼 이러한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하며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홍국영이기에 영정조시대 대표적인 정조의 편에 선 중심인물로 표현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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