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이방원의 최측근이지만 일평생을 유배지에서 보낸 이숙번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10. 18. 23:28
반응형

이방원의 최측근이지만 일평생을 유배지에서 보낸 이숙번 그는 누구인가?

이방원이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오르기까지 함께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하륜과 이숙번이다. 둘은 묘한 듯 하지만 분명 다른 부분이 있는 인물이다. 그 중 특히 이숙번은 중용된 하륜과는 달리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안하무인처럼 굴다가 평생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던 인물이다. 이숙번 그는 과연 누구인가?

 

육룡이나르샤의 이숙번

|이숙번의 출생과 가문

 

1373년 이숙번은 아버지 이경과 영양 남씨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산 이씨다. 그의 어머니 남씨부인은 이경과 결혼하기전 이미 윤씨와 결혼했던 몸으로 당시 두 아들 윤자량과 윤자당을 키우고 있었는데, 남편 윤씨가 죽고 이경과 다시 결혼을 하니 이숙번과 두 형은 이복형제라 할 수 있겠다. 이숙번은 기억력이 좋고 똑똑하기로 어려서부터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의 출생에 관하여 <용재총화>에 기록되기를 이숙번이 태어나기 전 윤자당이 7살때 그의 어머니 남씨와 함께 무당에게 점을 본일이 있었는데, 무당은 윤자당이 그의 동생 덕분에 귀함을 얻으리라 했고, 남씨부인이 이미 남편이 죽어 윤자당의 동생은 낳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하자, 남씨가 재혼을 하여 동생을 얻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후 남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이숙번인 것이다.

 

대왕세종의 이숙번

|이숙번 이방원의 눈에 들다

 

1393년 조선 최초의 문과에 급제하여 21살의 나이로 벼슬길에 오른 이숙번은 이방원의 처가인 민무구의 소개로 이방원을 만나게 된다. 이방원이 자신을 도울 수 있겠냐는 질문에 '그런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고 말하며 이방원의 눈에 들게 된다.


이후 지안산군사를 거쳐 여러벼슬을 역임하다 결정적으로 1398년 이방원이 일으킨 제 1차 왕자의 난 때 군사를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척살하였으며 그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이후 2년 뒤, 박포가 이방간을 꼬드겨 일으킨 제2차 왕자의난에서 자신의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일조를 하고 곧바로 벌어진 조사의난에서는 직접 군을 지휘해 반란을 진압하니 태종 이방원은 이숙번을 더욱더 신뢰하였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숙번

이숙번 권세를 잡고 안하무인이 되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후 이숙번은 좌명공신 1등이 되었고, 문신임에도 여러차례의 난을 제압하는 등 무예와 용병에도 일가견이 있어 조선의 병권을 손에 쥐는 병조판서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렇게 탄탄대로를 걷게 된 이숙번은 자신의 권세를 막무가내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숙번은 돈의문(서대문)에 안에 크게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돈의문을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던지라 그 소리가 컸다. 그러자 당시 도성의 서쪽문이었던 돈의문을 막아버린다. 그러자 백성들은 이숙번의 집을 성문을 막은 집이라 하여 '색문가'라고 손가락질 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돈의문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어 불편함을 겪자 이 소식은 조정에까지 닿았고, 조정에서는 문을 하나 새롭게 더 내어 백성의 불편함을 덜어주고자 했다. 그런데 이 문도 이숙번의 집을 지나게 되자, 이숙번이 당시 정종이 거처하던 궁이었던 인덕궁 옆으로 길을 열고 문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조정이 그대로 따르니 그야말로 이숙번의 권세가 얼마나 하늘을 찔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정종이 동생 태종 덕택에 왕위에 오른 바지왕이었긴 하지만 이를 이숙번이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이다.

 

용의눈물 이숙번

|이숙번의 계속되는 안하무인 행태 

 

이숙번의 안하무인 행태는 계속된다. 1414년 좌찬성에 있을 때 설을 맞아 태종이 상왕인 정종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간다. 이때 이숙번이 하륜과 함께 풍악을 울리는 등 예를 갖추지 않자 사간원에서 비판을 한다. 이에 이숙번은 자신들을 비판한 사간원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린다. 여기에 조정대신들이 참여하지 않자 성석린, 남재 등을 밤에 찾아가 상소장에 이름을 올릴 것을 강요한다. 그러고보면 자신의 처가까지 몰살시킨 이름하여 킬방원이 이숙번을 봐주는 것도 한참 봐주는 것이다. 

태종 16년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 스님이 사대부 과부와 눈이 맞아 간통을 했는데, 조정 모든 대신들이 이 같은 충격적인 일에 참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숙번만 곤장으로 다스리길 원했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 모두 참형에 처해지자, 이숙번은 태종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태종이 불러도 조정에 나오지 않고 오히려 태종을 비판하기까지 한다. 여기에 17년 자신의 밑에 있던 박은이 우의정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토로한 일이 또 다시 태종에게 들어가니 태종도 참으로 많이 참고 또 참았다 할 수 있겠다.

 

|이숙번의 최후 

모든 세상을 가진 듯 날뛰던 이숙번도 이제 끝이난다. 1417년 양명대군이 태종의 눈 밖에 나는 사고를 연이어 치던 도중, 비리로 근신중인 구종수 형제가 자신들의 뒷일 잘 봐달라며 양명대군에게 주색과 향응을 제공한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구종수형제를 다시 유배형에 처했는데, 정신 못차린 구종수형제가 양명대군에게 말과 활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이숙번에게 보냈다가 그대로 걸려버린다. 

여기에 당시 조선에는 가뭄이 심하여 태종과 신하들이 온통 가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나섰는데도 이숙번이 조정에 출입하지 않았고 이에 맞춰 그를 탄핵하는 조정대신들의 상소가 줄을 이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이 마침내 이숙번을 삭탈관직하고 공신 직첩을 모두 회수했으며 1417년 경상도 함양땅으로 유배를 보내게 된다. 이후 죽을때까지 이숙번은 유배형을 벗어나진 못한다. 

그러다가 세종때, <용비어천가>를 지으면서 조선 개국 초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이숙번을 아주 잠시 한양으로 불러와 편찬에 참여케 하고 편찬이 끝나자 용서해줄법도 한데, 복권하지 않고 함양 유배에서만 풀게하여 경기도 땅에서 살게 한다. 사실 세종이 한때 공신이었던 이숙번을 다시 부를 법도 한데 외면한 것은 태종이 이숙번을 불러서는 안된다고 했던 말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세종실록에 나와 있다. 

"이숙번이 성격과 태종의 총애를 믿고는 방자하게 행동하여 노여움을 산것이지 불충한 것은 아니었다. 태종이 태상왕이 되어 황희를 용서할 때 말씀하시기를, '이숙번의 공이 매우크나 그 죄 역시 큰 까닭이 있다 하겠다. 허나 그 죄가 크더라도 공으로 덮어주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태종께서 등용하지 않았는데 어찌 내가 등용하겠는가 " <세종실록> 


여튼 이숙번은 경기도에서 살다가 1440년 병으로 죽고 만다. 끝까지 정계에 다시 복귀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묘는 지금 경기도 시흥시 안성 이씨 묘역에 있으며 그의 증조할아버지부터 이숙번까지 모두 묻혀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