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그늘에 가려진 조선 제 2대왕 정종 이방과 그는 누구인가?동생의 그늘에 가려진 조선 제 2대왕 정종 이방과 그는 누구인가?

Posted at 2021. 10. 21. 21:11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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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그늘에 가려진 조선 제 2대왕 정종 이방과 그는 누구인가?

여말선초, 고려와 조선 그리고 왕자의난까지 말 그대로 난세의 연속이었다. 난세에는 영웅이 나오기 마련,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은 조선을 세우고 그 기틀을 다진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조선 제 2대왕으로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 정종은 우리가 알고 있긴 하지만 유독 그 동생 태종 이방원의 강력한 포스에 밀려 그냥 넘어가는 인물이다. 정종 그 이름 이방과 그는 누구였을까?

 

정종의 가계도

|정종 이방과의 출생과 성장 

조선 2대왕 정종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차남, 두번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기로 이름을 떨치던 왕자였다. 

 

정종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큰 아우라를 남기지 않았더라도 그는 어엿한 장수로써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했던 아들이었다. 20살의 나이로 1377년 벌어진 고려말 왜구와의 대전이었던 황산대첩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기여하는 한편, 32세인 1388년, 이성계가 당시 고려의 권문세족을 몰아낼 때 이인임 세력을 박살 내는데 함께 참여했으며, 위화도 회군 당시 우왕의 진영에서 벗어나 이성계에게 빠르게 합류하여 이성계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하는 등 활약을 했다.

 

이렇게 정종이 군을 이끌고 이성계와 함께 전쟁과 고려 조정을 누빈 것은 그의 역할이 장남 이방우에 못지 않게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이성계의 신임을 어느정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정몽주의 암살에도 이방원 못지 않게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밝혀지진 않았다.

드라마 <육룡이나르샤> 정종

|조선 건국 후 

1392년 조선 건국 후 이방과는 영안군으로 책봉되며 태조의 친위부대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임명된다. 그만큼 이성계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장자인 이방우가 있었으나 그는 세자자리에 관심이 없었고 지병으로 조선 건국 1년 후인 1393년 사망하면서 차남 이방과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조선 개국 후에도 이방과는 군을 이끌고 왜구 척결에 앞장섰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아 1395년 39세의 나이로 중군절제사의 자리에 오르며 병권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도전 일파의 요동정벌론에 기초한 것이었는데, 이방과는 이러한 당시 정세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방과 왕위에 오르다

 

태조 7년이었던 1398년,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이 드디어 칼을 빼들었고 배다른 동생 이방번, 이방석을 죽이고 그의 후견인이라 알려진 정도전 일파를 참살하는 제1차 왕자의난이 벌어진다.


이후 이방원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는 차마 민망했는지 둘째 이방과를 세자에 임명케 하고 1개월 뒤인 그 해 9월 태조의 왕위를 이방과가 넘겨 받으니 제 2대 정종이 된다. 군인에 더 가까웟던 이방과는 사실 자신이 왕에 오를 생각이 없던지라 극구 사양했지만 어쩔수 없이 껍데기뿐인 왕위에 오르게 된다.

 

용의눈물 이방과

|정종의 재위기간

 

생각치도 않았던 왕위에 오르고, 이미 모든 실권은 동생 이방원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정종은 정치에도 그닥 관심이 없었다. 또한 스무살 때부터 군을 이끌며 자신의 아버지 이성계와 전쟁을 누볐던 그였던지라 왕이 아닌 군인에 더 잘어울렸고, 그는 궁에서 곧잘 격구를 즐겼다고 한다. 또한 사냥도 즐겨하며 잡은 사냥감은 꼭 상왕 태조 이성계에게 보냈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왕자의난을 명분으로 잠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으나 정종 2년인 1400년에 또 한번 넷째 이방간이 동생 이방원을 공격하는 제2차 왕자의난이 발생하게 된다. 2차 왕자의난이 벌어지자 정종은 분노하며 이방간을 타이르고 군을 해산할 것을 명했으나 이방간은 그대로 궁궐로 쳐들어왔고, 결국 그는 이방원의 상대가 되지 못한채 패배하고 만다. 

이방원이 이방간을 붙잡고 차마 같은 배에서 난 형을 죽일 수 없어 이방간의 처우를 정종에게 물어보자 선처를 해달라 말을 했고 이방간은 유배길로 떠나게 된다. 이후 이방간의 유배길에 식읍을 주고 편지를 전해주는데 이 편지를 본 이방간이 통곡한다. 

"네가 가는 토산군은 방간이 네가 전에 이끌었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안산으로 가는게 좋겠다. 네게 식읍을 줄 것이니 편한대로 땅을 맡기고 살아라, 이후 서울에 들어와서 서로 정을 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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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의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즐기다

 

제2차 왕자의난이 끝나고 정종은 왕위에 오른지 2년 2개월만에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며 상왕이 된다. 이후 20년여를 전국의 온천을 다니며 유람하고 불공을 드리면서 일생을 살아간다. 때문에 왕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처가도 도륙했던 태종 이방원은 권력에 욕심이 없는 정종과는 그 우애가 돈독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 즉위 원년, 그러니까 태종도 상왕이 되었고 정종이 태상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첫눈이 내렸는데 이 날 정종과 장난을 쳤다는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였다. 여튼 그의 양위 후 인생은 오히려 왕이 되고자 했던 태종 이방원이 부러워했을 정도라니 너무나 즐거웠던 여생이었을 법 하다.

 

정종 묘 후릉 <개성에 위치 조선왕의 묘중 이성계의 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북한에 있다.>

 

|정종의 사후 - 묘호를 받지 못해 공정왕이라 불리다.


정종은 1419년 세종 1년에 상왕 태종과 세종이 보는 앞에서 63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이후 정종은 유언을 통해 지금의 개성에 묻힌다. 

 

정종은 죽고 바로 묘호를 받지 못하고 공정왕이라는 생뚱맞은 이름으로 불려야 했다. 이는 당시 정조의 많은 자손들이 대군의 자손 대우를 받고 있었고, 묘호를 준다는 것은 국왕의 자손으로서의 대접을 받아야했기 때문에 왕의 이름을 정하는 묘호를 쉽게 물려줄 수 없음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명나라에서도 정종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왕이 없기에 잠시 대행을 맡은 인물 정도라 생각했기 때문에 정종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세종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 태종이 이성계의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 받는 그림을 생각하고 있었고, 창업군주에게는 태조의 묘호를 붙이고 그것을 바로 계승한 2대왕에게는 태종이라고 불렸던 것이 중국 역사의 행보였던지라, 정종이 태종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 정통성을 쉽게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죽은지 262년이 지난 숙종대에 들어와 정종이라는 묘호가 붙여지게 된다. 이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는 뜻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정종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힘들게 붙여진지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종은 사실 이방원의 그늘아래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약한 왕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이성계를 따라다니며 군을 통솔했고, 조선 건국 후에도 왜적을 연달아 물리치며 병권에도 참여했던 왕자였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상왕이 된 이성계를 향한 효심이 지극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정종이 출연한다면 정종의 삶을 생각해보며 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도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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