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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는 신돈의 자식이었을까? 고려 우왕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10. 24.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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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는 신돈의 자식이었을까? 고려 우왕 그는 누구인가?

여말선초 무너져가는 고려의 왕들은 왕권도 약했고 그 최후가 비참했다. 그런데 고려 제32대 왕 우왕은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마저 누구인지 모른채, 왕위에서 쫒겨났고 위화도회군으로 돌아온 이성계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고려 우왕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을까? 우왕 그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라마 정도전의 고려 우왕

|우왕의 출생

우왕은 한 평생을 그 혈통에 관하여 시비가 있었고, 또 왕위에서 쫒겨날 때도 혈통에 관한 시비였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공민왕과 그 출생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반원정책을 펼치며 고려 후기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던 공민왕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노국공주가 죽으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후 자신의 모든 전권을 그가 신임했던 신돈이라는 중에게 맡기면서 신돈은 모든 권세를 지니게 된다. 이때 신돈은 노국공주를 잃고 슬퍼하면서 아이까지 없어 후사를 걱정하는 공민왕에게 자신의 여종인 반야를 바치면서 아이를 얻게끔 했는데, 공민왕과 동침한 반야가 정말로 아이를 잉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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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신돈은 반야를 궁이 아닌 자신의 친구인 승려 능우에게 맡겼고, 1365년 이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모니노(우왕의 어렸을 적 이름)였다. 1371년 신돈이 자신의 권세를 남발하다 역모죄로 몰려 유배되자 공민왕은 자신이 아이가 있음을 조정에 밝히고 모니노를 궁궐로 데려오게 한다. 

 

드라마 <정도전> 이인임과 우왕

|이인임과 우왕

공민왕이 우왕을 궁궐로 부르면서 당시 수시중으로 있던 이인임에게 '신돈에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 가까이 했더니 아들을 얻었다며' 자신의 아들을 지켜줄 것을 부탁한다. 이때부터 고려 최후의 간신 이인임과 우왕의 인연이 시작된다. 여튼 우왕은 당시 명덕태후 홍씨에게 맡겨지고 그의 이름을 모니노(석가모니의 종)에서 '우'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1374년 공민왕이 홍륜 등 일파에 의해 살해 당하기 직전에 이미 사망하고 없던 궁인 한씨를 왕우의 어머니라는 고백을 하며 한씨의 3대 조상은 물론 외조에게 벼슬을 내리는 행동을 한다. 또한 공민왕이 죽고, 왕우가 왕위에 올라 우왕이 되자 궁인 한씨가 순정왕후라는 시호를 얻게된다.

 

그러나 정작 우왕의 친모인 반야는 우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다가 이인임에게 죽임을 당하고 임진강에 수장을 당한다. 이는 공민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우왕의 어머니가 신돈의 여종인 반야라고 한다면 분명 혈통에 문제가 생길 것이기에 이를 염려한 공민왕이 이미 죽고 없어진 궁인을 우왕의 어머니라 지목한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공민왕이 죽고 공민왕을 살해한 살해범들을 체포한 이인임은 순식간에 권세를 지니게 된다. 이때 10살이었던 왕우를 왕위에 올리니 세상은 이제 이인임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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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나르샤 <우왕>

|우왕 패악질을 부리다 - 이인임의 몰락과 최영의 부각

우왕은 조정의 일은 이인임에게 맡긴채, 그야 말로 패악질을 부리며 산다. 사냥은 물론이거니와 여색도 엄청나게 밝히며 산다. 때문에 조정은 이인임 일파의 권신들에게 농락당하기 일쑤였고, 백성들은 철저하게 빼앗기며 도탄에 빠졌고, 고려는 무너져갔다.

 

여기에 외교적으로도 중국은 원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명나라가 떠오르며 한치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일본 역시 끊임 없이 고려의 영토를 약탈하며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수많은 왜군과 홍건적 등을 격파한 이성계 등이 활약을 하면서 이인임과는 반대되는 신흥 무장 세력이 점차 위상을 높이기 시작했고 세력 또한 커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의 횡포는 날로 심해져 조정의 국고를 파탄내고 막대한 토지를 거느리며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상황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최영이 1388년 문하시중의 자리에 오른 후, 이성계의 손을 잡고 우왕의 재가를 받아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족 등을 숙청했다. 이러한 공로로 최영은 고려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최영의 딸을 우왕이 아내로 맞아드렸는데, 우왕도 나름대로 그동안의 패악질에서 벗어나 최영을 등에 업고 정치를 한 번 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특히 최영의 딸인 영빈 최씨를 왕비로 받아들인 것은 당시가 1388년 요동정벌이 감행 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우왕은 최영을 통해 자신을 지켜줄 안전장치를 확보하려는 나름의 정략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위화도회군과 우왕의 폐위

우왕이 폐위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위화도회군을 알기전에, 당시 고려는 원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명나라에 무너져 갈지라도 바로 원나라를 버리기가 힘든 상태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고려가 북원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자신들을 상국으로 섬길 것을 요청했고 고려는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1388년 2월,  명나라가 일방적으로 철령 이북의 땅을 자신의 요동부에 귀속시키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철령 이북이 원나라 것이었으니 이 영토 역시 자신들의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러자 안그래도 명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최영을 필두로한 조정은 회의를 거듭했는데, 최영은 마침내 요동을 정벌하기로 마음먹고 우왕을 설득해 요동정벌 준비를 나선다. 

 

그런데 명나라가 요동도사로 2명의 지휘관에게 1천의 군사를 주어 요동을 접수하려 하자 우왕은 요동정벌계획을 수립하고 8도에서 군사를 징집하게 하였으며 최영과 서해도로 가서 요동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전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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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찍부터 요동정벌의 무모함을 외치던 이성계는 우왕을 끊임 없이 설득하여 요동정벌을 막으려 했으나 최영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1388년 5월, 압록강의 위화도에 머무른다. 그러나 압록강에 물이 불어나 진군을 못하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허락해달라는 청을 넣었는데 우왕과 최영은 요동으로 향하라는 답변만 내놨다.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의 명을 어기고 마침내 회군을 결정하여 개경으로 향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군대가 다 요동정벌군에 총 동원되었으니, 개경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에게 결국 무릎을 꿇게 된다. 최영은 그해 12월 유배되었다가 참수 당한다. 우왕 역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폐되었다가 1389년 11월 강릉으로 다시 옮겨진다. 

 

우왕의 죽음

|우왕의 최후

우왕이 강릉으로 유배되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공양왕을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당시 위화도회군을 함께하며 정적으로 떠오른 조민수가 우왕의 아들 창왕 옹립을 주장했던지라 창왕이 옹립되었다. 

 

그런데 창왕 때 우왕이 복위를 꾀한다는 사건에 연루되었고, 조민수를 몰아내고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성계가 우왕의 혈통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우창비왕설(우왕과 창왕은 왕씨의 혈족이 아님)을 내세우며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린다. 이후 1389년 12월 정당문학 서균형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죽인다. 이때 우왕의 나이 25세였으며 그의 어린 아들 창왕 역시 후에 죽임을 당한다. 

우왕이 죽은 후 최영의 딸이자 우왕의 아내였던 영빈최씨가 우왕의 시신을 끌어 안고 밤낮으로 통곡했다고 전해지는데, 우왕이 어디 묻혔는지는 알 수 없다. 여튼 우왕은 결국 조선 건국 세력에 의해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으로 낙인찍혔는데, 이는 많은 설이 있고 지금도 알 수는 없다. 차라리 우왕의 묘라도 있으면 DNA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가려볼 수나 있겠으나 그 방법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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