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형과 동생의 엇갈린 선택 남은의 형, 태종의 심복 남재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12. 3.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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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동생의 엇갈린 선택 남은의 형, 태종의 심복 남재 그는 누구인가?

여말선초 정도전과 이방원의 갈등속에서 돋보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정도전의 충직한 오른팔 남은이다. 많은 사극에서 남은은 정도전과 함께 이방원의 칼날에 최후를 맞는 인물로 나와있다. 그런데 남은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방원이 너무나 아꼈던 인물이 있다. 바로 남은의 형 남재이다.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조선을 세운 정도전의 대표 측근으로 그 최후까지 함께한 남은

 조선을 세운 정도전의 대표 측근 남은 고려말 조선초의 정도전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와 함께 조선을 세운 동지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정도전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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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드라마에서 남은은 주요 캐릭터지만 남재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 남재의 출생과 조선 건국까지

남재는 1351년 고려 충정왕 때 태어난다. 이색의 제자로 1371년 처음 벼슬에 오른 뒤 좌부대언의 자리까지 오른다. 그 동생 남은과 함께 이색의 제자였던 정몽주, 정도전, 조준 등과 친했으며 이성계 세력으로써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힘쓰기 시작한다. 1390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했을 때, 윤소종과 함께 계책을 세워 이성계를 도움으로써 회군공신이 된다. 

 

이후 1392년 이성계가 왕이되어 조선을 세웠을 때 남재는 상을 받고 싶지 않다며 지방으로 피신해있었다. 그러나 태조가 남재를 수소문하여 결국 찾아냈고 남재가 건강하게 있다는 것을 기뻐하여 '재'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때부터 본명인 남겸이 아닌 남재로 불렸으며 스스로 자신의 자를 경지라 하였는데 이는 태조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이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남은

|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운명이 바뀐 남재와 남은 

1393년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명나라와 조선의 사이를 개선하고자 명나라로 떠나 태조로부터 3년에 1차례 조공을 허락 받았고 판중추원사, 참찬문하부사가 되었다.

 

1394년에는 정안군이었던 이방원이 명나라로 떠나게 되자 아무도 따라가려 하지 않았지만 남재는 '정안군이 만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가 어찌 베게를 베고 죽겠습니까?'하면서 명나라에 따라간다. 

 

이후 1396년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왔으며 이때 정국이 정도전 및 동생 남은 등이 급진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것에 뜻을 같이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정적 이방원과 함께 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도전과 남은은 이방원에게 척살 당하였는데 이방원은 남재를 자신의 집으로 보내 목숨을 구하게 했으며 잠시 의령땅에 내려가게 했다가 복귀시킨다. 

이때 이방원은 '남재는 평소 남은과 마음을 함께 하지 않았으니 연관시켜 미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를 구했다. 이때를 태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은 남재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럼에도 남재는 두려워하며 집에 있던 당시 어린 충녕대군(세종대왕)을 안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던 원경왕후 민씨가 남재에게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남재는 그렇지 못하고 태종의 집에서 도망간다. 

제1차 왕자의난 이후, 나라에서는 남재를 찾고 있었는데 남재는 시골집에서 숨어 있다시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시골집의 할머니가 남재를 알아보자, 남재는 '내가 가난하니 그 남재였으면 좋겠다'하며 도망갔고길에서 태종의 심복이었던 마천목을 만나게되고 마천목이 남재를 알아보자 남재는 '내가 누구인지 아시오?'라고 하며 자리를 떠나려하자 마천목이 웃으며 그만하자고 했다 전한다.

이 같은 이야기를 이방원이 태종이 된뒤 신하들 앞에서 농담으로 말하자 신하들 모두 웃으면서 남재의 이야기를 늘어 놓았고 남재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고 전해진다.

남재 묘역

| 3번의 왕을 추천한 남재

1938년 정종 즉위 후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해달라며 가장 앞서 말한 사람이 바로 남재였는데, 이방원이 이를 듣고 화를 낸척 했다고 전해지나 당시 세상사람들은 그다음 왕은 이방원임을 알았던만큼 이방원은 속으로는 남재를 응원했을 것이다.  

 

1400년 이방원이 태종이 되기까지 하륜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즉위하자 경상도관찰사, 찬성사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세자부까지 겸했으며 1416년에는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남재가 좌의정일 당시 충녕대군이 남재의 집에가서 잔치를 했는데 남재는 충녕대군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준다. 남재는 태종이 왕자였던 시절을 말하며 태종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며 권했다. 이때 태종이 왕자가 공부 해봐야 어디에다 쓰겠냐고 묻자 남재는 '왕의 아들 가운데 누가 왕이 되지 못하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재는 이 이야기를 충녕에게 들려주며 '대군께서 공부를 좋아하시니 마음이 기쁘다'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이때는 양녕대군이 세자였던 때였는데, 남재는 충녕대군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나중에 이를 들은 태종이 '남재는 과감하다'며 웃었다고 전해지니 태종이 얼마나 남재를 아꼈는지를 알 수 있다.

 

|남재의 죽음 

남재는 1419년 세종 1년 68살의 나이로 죽었으며 태종의 묘에 함께 배향된 7명의 신하중 한명이다. 남재의 손자는 태종의 딸 정선공주의 부마인 남휘이며 그의 고손자는 그 유명한 장군 남이이다.

 

그의 묘는 지금의 남양주시 별내동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현재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릉 자리가 남재가 봐둔 묘역이었는데 지세가 천하명당인지라 태조가 탐을 냈고 남재에게 원래 본인의 묘자리를 주고 남재에게 지금의 건원릉자리를 양보 받았다고 전한다. 

태조가 고마워하며 남재 묘자리는 물론 주위 전답을 모두 남재에게 주었는데 남재가 묘자리가 명당이긴 하지만 기세가 사나워 멸문을 당할 수도 있다 말하자 태조가 후손 중에 역적이 나와도 당사자만 벌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후 남재의 고손자 남이가 역모로 죽었을 때 멸문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한다. 또한 이와 별개로 태조와 남재가 서로 근심을 덜었다며 말한 곳이 지금의 망우리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는 글솜씨는 물론 산수에 뛰어나며 성격이 무난하고 활발했다는 평가가 남겨져 있다. 

 

다만 남의 재산을 빼앗아 원망의 소리가 들렸으며 다른 동생이었던 남실이 가난했음에도 돕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남재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이 아꼈던 재상으로 정종을 제외한 3명의 왕을 세우는데 공이 있었고, 그렇기에 승자와 시대를 읽는 안목이 있던 인물로 평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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