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정도전, 정몽주의 스승 조선 사대부의 뿌리 이색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12. 6. 20:58
반응형

정도전, 정몽주의 스승 조선 사대부의 뿌리 이색 그는 누구인가?

고려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등장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진사대부 세력인 정도전, 정몽주와 같은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이들의 스승으로써 당시 고려의 유생들을 이끌며 조선 성리학의 뿌리와 같은 인물들을 키워낸 스승이 있다. 바로 목은 이색이다. 무너져가는 망국 고려를 부여잡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고려말 대학자 이색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이색 초상화

|이색의 출생과 성장

1328년 태어난 이색의 본관은 한산(충남 서천)이며 그 아버지는 이곡은 고려를 넘어 원나라 과거에도 급제하며 조정에서도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 이색이 어렸을 때 그 아버지 이곡은 원나라 조정에서 활동중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훈육 아래 자란다. 이색은 어렸을 때부터 총기가 뛰어났으며 이미 7살때부터 산에 올라가 책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3세의 나이에 고려 성균관시에 합격하면서 그 천재성을 입증했는데, 그럼에도 그 어머니는 이색의 학문적 소양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아들 이색을 여러 산에 보내 공부하게 했고 이곡 역시 원나라에서 아들 이색의 학문 소양을 높이라는 시를 보낼 정도로 그 교육열이 대단했는데 4년간이나 이색은 학문을 갈고 닦는데 보낸다. 

 

이색은 18살때 안동권씨 가문의 딸과 결혼했는데 당시를 대표하는 귀족가문중 하나였다. 이때 고려 귀족가문들은 이색을 사위로 맞아들이기 위해 혼례를 올리는 날까지도 싸웠다고 하니 실로 이색의 명망이 어렸을 때부터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혼인을 하고 19세때 이색은 마침내 아버지 이곡이 있는 원나라 연경을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아버지 덕분에 원나라 국자감(원나라 시대 최고 학부)에 입학을 하게 되며 또 다른 배움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3년을 국자감에서 공부를 한 이색은 잠시 고려로 돌아왔다가 1350년 국자감에 복학을 하는데, 1351년에 갑작스러운 아버지 이곡의 죽음으로 인해 이색은 고려로 다시 돌아왔고 아버지 이곡의 3년상을 치룬다. 이때 이색의 나이 23살 고려는 공민왕 1년이었다.

 

|공민왕 시대 이색

공민왕대의 이색은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공민왕 역시 개혁의 뜻을 품고 고려를 다시 세울 왕이었기에 고려에게는 나라를 다시 일으킬 절대절명의 기회였다. 이색도 이런 배경을 잘 알고 있었고 공민왕 역시 이색을 중시하여 이색은 고려 조정의 요직을 두루 겸하게 된다. 

그는 공민왕의 개혁에 적극 동참하며 권문세족을 견제하는 한편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리학을 개혁의 비전으로 삼고 제시한다. 또한 홍건적과 왜구로 인해 위협에 빠진 고려의 조정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고, 윤소종, 권근, 이숭인 등 인재들을 발탁하여 고려 조정에 활기를 불어 넣는데 최선을 다한다. 

공민왕 역시 말기로 갈수록 미쳐가는 와중에도 이색과 이성계를 가리켜 문무 최고의 재상을 얻었다고 극찬하였다고 전해진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색의 행보

공민왕이 홍륜 등에게 암살 당한 이후 그 아들 우왕이 오르자 고려 조정은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우왕이 왕위에 오르고 이색은 우왕 초기까지 몸이 안좋아 벼슬에 물러나 있었는데 1379년(우왕 5년) 우왕을 비롯한 조정의 간곡한 부탁으로 우왕의 스승 자리로 이색은 복귀한다.

그러나 고려 우왕과 최영 장군의 요동정벌이라는 무리수 때문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게 되고 곧바로
우왕을 폐위한 이성계 세력은 그 후사로 추후 공양왕이 되는 정창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

 

이때 이색이 나서 우왕의 아들 어린 창왕을 왕위에 올리게 되니 이때부터 이색은 이성계 세력에 대항하는 온건개혁파로서 무너져가는 고려를 어떻게든 잡으려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창왕 역시 폐가입진(가짜를 몰아내야 한다)을 명분으로 한 이성계 세력의 주장으로 인해 폐위 당해 유배를 떠난 후 죽게되고 
뒤이어 왕위에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다.

 

이때 이색은 이성계 세력의 급진적인 전제개혁(토지개혁)에 필사적인 반대를 하지만 자신의 제자이자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 정몽주마저 피살당하고 마침내 공양왕마저 몰아낸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하자 이색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자신의 고향 한산으로 돌아온다.

 

충남 서천에 위치한 이색 묘

|이색의 죽음

이색이 고향으로 내려간뒤, 태조 이성계는 민심을 회복하고 신진사대부의 마음을 돌리고자 이색을 한산백에 책봉하고 곡식들을 내려보냈다. 그러나 이색은 이성계의 화해의 제스쳐에도 답하지 않았고 1396년 피서차 지금의 여주 신륵사 앞의 여강에서 배를 타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이때 이색의 나이 68세였다. 

 

일각에서는 이색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성계의 화해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타살의 의혹도 제기되었다.

태조는 이색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흘동안 조회를 중지하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고려의 대학자이자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나라 조선의 이색에 대한 배려라 할 수 있겠다. 이색은 지금 그의 고향 한산 (충남 서천)에 묻혔다. 

 

이 묘자리는 풍수지리에 대가 무학대사가 추천해준 자리라고 한다. 이색은 죽었지만 이색의 후손들은 나름대로 조선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그 중 선조대에 영의정을 한 이산해가 대표적이다. 


이색은 이렇게 죽었지만 그의 제자들 정몽주, 정도전, 하륜, 권근 등은 분명 조선의 성리학의 근간이 되었고 뿌리가 되었다. 비록 망국 고려를 구해내지 못한 학자였지만 우리 역사에서 그의 정신과 발자취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