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거북선 발명가? 이순신과 함께한 조선 함선의 아버지 체암 나대용

윤여시 2022. 5. 1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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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발명가? 이순신과 함께한 조선 함선의 아버지 체암 나대용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 장군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름모를 조선 수군이 함께였고, 그리고 왜군이 이끄는 함선보다 훨씬 더 기동성과 내구력에서 뛰어난 조선의 함선이 있었다. 그리고 이 함선을 끝없이 연구하고 만든이가 있었으니 바로 체암 나대용이다.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체암 나대용의 초상화

|체암 나대용의 출생과 무과 급제

나대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36년전인 1556년 지금의 나주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특전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조선의 군사조직 중 하나인 정로위로 복무하던 나항의 장남이었다. 사실 나대용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밝아 향교의 교생으로 다니며 문신을 꿈꿨으나 당시 영산강 유역까지 올라와 약탈을 일삼는 왜군에 분노하여 무신 준비한다.

그리고 1583년, 28살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병 교관으로 복무하게 된다. 나대용은 품성이 강직하고 윗사람에게 잘보이기 보다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옳은 소리를 하는 인물이었고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나대용은 무과에 급제한지 8년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불멸의이순신 중 나대용

|체암 나대용 거북선을 만들다 

낙향후 나대용은 거북선을 보완 개발하는데 많은 것을 바친다. 사실 거북선은 태종 이방원 때 이미 귀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태종실록을 보면 귀선이 왜선과 싸우는 것을 태종이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던만큼 그 실체는 분명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 나대용 전까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또 만들어지고 있는지는 기록으로 없는것을 보아 귀선은 잠자고 있는 함선임은 분명해보인다. 

그런데 나대용이 거북선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1591년 나대용을 알아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에게 발탁되어 군관으로 재직하며 자신이 연구한 거북선을 현실화 시키게 된다. 그리고 1592년 4월 12일 마침내 전라좌수영 앞바다에서 거북선은 바다에 그 몸을 띄었고 발포까지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하루 뒤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전라좌수영 이충무공전서에 그려진 귀선

|임진왜란, 나대용의 함선이 빛을 발하다 

임진왜란 발발후 단순히 거북선의 제작뿐 아니라 나대용은 조선 군선의 제작을 책임지는 군관으로 그 역할을 다한다. 또한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는 유군장직을 수행하며 왜선 두척을 박살내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두 번째 전투인 사천해전에서 마침내 자신이 만든 거북선을 처음 등장시키며 왜선 13척을 모두 분쇄시켰고 수많은 왜군을 죽이는 전과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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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난히 전투중에 부상을 많이 당하였는데 사천해전에서 총탄에 맞고 당항포 해전과 한산도 해전에서도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나대용은 항상 앞서 싸웠고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 1594년부터 1596년까지 강진, 금구, 능성, 고성의 현감을 역임하며 전란으로 실의에 빠진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다. 

 

|임진왜란 이후 나대용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모함으로 탄핵 당하여 백의종군하자 나대용은 상소를 올려 이순신 장군의 억울함을 풀려 했고. 이순신 장군의 복귀 후 명량해전을 함께 하며 다시 한 번 조선 수군의 부활을 알린다. 이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자신의 사촌 동생 나치용이 전사했음에도 끝까지 전투에 임하여 승전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나대용은 함선 개발을 놓지 않는다. 나대용은 1606년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창선을 새롭게 개발한다. 이는 거북선과 조선수군의 주축 함선이었던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한 함선이었으며 125명이 필요한 판옥선에 비해 
격군 42명으로도 배의 운용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은 좀더 효율적으로 함선을 운용할 수 있었다. 

나대용의 이러한 열정은 왕이 바뀌어도 계속된다. 1610년 광해군 2년에 남해현령이 된 나대용은 해추선이라는 이른바 쾌속선을 개발하여 전투 중에 활용하기도 한다. 1611년 이러한 공들을 인정 받아 경기수군을 관장하는 교동수사에 올랐으나 왜란 때 입은 부상들이 재발하면서 부임하기 전인 1612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1200톤급 잠수함인 나대용함, 나대용 장군의 수군과 함선에 대한 열정을 품은 함선이다

|나대용 장군에 대한 평가

나대용에 대한 평가는 역사속에 기록되어 있다. 권율이 당시 조정에 올린 상소에 한 대목을 살펴보자  '체암공(나대용)이 없었던들 충무공(이순신)이 그 같은 큰 공을 세울 수 없었으며 '체암 공은 충무공이 없었던들 거북선 제작을 실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평가가 이를 말해준다. 뿐만 아니다. 충무전서를 살펴보면 '충무공이 거북선 뿐 아니라 다른 무기 제작도 체암과 함께 의논했다'라고 쓰여 있다. 

이순신은 나대용의 능력을 알아봤고 나대용은 자신의 능력을 백프로 발휘한 것이며 이 같은 노력이 조선을 구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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