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조선 후기 탕평의 성군이지만 아들 사도세자에게 가혹했던 영조는 누구?

윤여시 2021. 11. 8. 20:25
반응형

조선 후기 탕평의 성군이지만 아들 사도세자에게 가혹했던 영조는 누구?

조선 초기 최고의 성군으로 세종대왕을 꼽는다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성군을 뽑는다면 영조와 정조를 꼽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영조는 정치권에서 많이 쓰고 있는 탕평을 활용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왕으로 손꼽히지만 아쉽게도 그 아들에게만은 너무나 가혹한 왕이었기에 드라나마나 영화에서는 줄곧 그와 아들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조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영조의 초상

|영조의 출생 그리고 왕세제(왕의 동생)가 되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은 조선의 제일의 악녀로 알려진 장희빈에게서 경종을 낳았고 물을 깃는 무수리였던 숙빈최씨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 에게서 영조를 얻는다.

숙종의 두 아들은 남다른 콤플렉스가 있었다. 경종은 자신의 어머니가 사약을 받은 아픔을 지니고 있었고, 영조는 그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신분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거기다 당시 숙종대의 붕당 대립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던때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어 죽어라 싸우고 있던 와중이었다. 역시 왕자를 지지하는 것도 두 파로 나뉘어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고 있었고 영조는 노론이 밀고 있던지라 두 형제의 비극은 예고 되어 있었다.

한 편, 노론의 경우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에 깊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서든 경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쉽진 않았고 하는 수 없이 영조를 그 뒤 왕위로 잇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조도 어릴때가 있었다

|영조 왕위에 오르다

60세의 일기로 숙종이 죽자, 위기에 처한 노론은 들불 같이 일어나 경종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고자 왕세제의 약속을 받아냈다. 사실 경종이 아직 어린지라 후사를 충분히 볼 수 있음에도 몸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몰아붙여 영조를 왕세제 자리에 올린 것은 다르게 생각하면 반역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노론은 영조를 왕세제 자리에 올리면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탄탄하게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괜찮았으나 노론의 일부에서 경종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까지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거의 역모에 가까운 제안)

그러나 이는 결국 경종과 소론의 분노와 명분을 이끌게 하는 꼴이 되었고 노론을 대표하는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가 유배를 떠나게 되는 신축옥사를 겪게 된다. 여기에 노론이 경종을 시해한다는 음모가 제기 되면서 4대신은 물론 노론의 신하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된다.

이때 영조의 목숨도 바람 앞에 등불처럼 언제 꺼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세제까지 내던지겠다면서 선포한 끝에 겨우겨우 살아남는다.

그런데 4년후, 경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세상을 뜨게 되니 그 뒤를 이어 연잉군 영조가 조선의 역사에 등장한다.

드라마 &lt;이산&gt;에서 영조 이순재

|집권 초기 - 이인좌의 난

영조가 왕위에 올랐으나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영조는 경종의 독살설에 휘말리고, 그의 어머니가 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등 그야말로 루머가 끊이질 않았다.

여기에 몇 남지 않은 남인 이인좌가 소론의 강경파들과 손을 잡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탄을 왕위에 올리자며 엄청난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난이다. 그냥 반란도 아니고 서울과 삼남지방 그리고 서북에서 짓쳐들어오는 그야말로 대규모의 반란이자 영조의 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인좌의 반란군이 큰 규모에 비해 연전연패를 하며 진압되면서 영조는 한숨을 돌리게 되지만 그 반란에 참가한 사람만 20만명이었던대다가 이인좌는 국문을 당하면서도 영조를 왕이라 인정하지 않으며 영조에게 큰 모멸감과 상처를 주고 만다.

그럼에도 영조는 이와중에 반역을 한 소론과 남인을 모두 없애지 않고 어느정도 유지하면서 노론과의 탕평을 하며 조정을 이끌어나갈 준비를 한다.

드라마 &lt;비밀의문&gt; 영조 역의 한석규

|집권 중기 - 탕평을 이용하여 조정을 이끌다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또 왕위에 올랐어도 당시 팽배해 있던 붕당의 끈을 끊지 않는 이상은 조선에 미래가 없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소론세력마저 살려두며 노론과 소론이 함께 조정을 이끄는 탕평을 펴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영수들을 불러 화목을 권했고 극단적인 인물들은 모두 조정에서 내보냈다. 여기에 관직도 나누어서 임명했는데 영의정이 노론이면 소론은 좌의정을 맡는 등 세심하게 균형을 맞추는 인사로 조정을 이끌어나간다.

이렇게 되자 영조는 탕평에서 한 발 더나아가 진짜 유능한 인물들을 당색을 보지 않고 조정으로 불러드리는 인재채용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탕평책에도 한계는 있었다. 겉으로는 탕평을 하는 듯 하지만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기에 노론이 중심이되어 소론의 불만을 완전히 잠재우기는 불가능했다.

또 노론 소론의 온건파들만 남게되자 영조의 말에 반대하는 세력은 전혀 찾기가 힘들었다. 특히 노론의 외척 가문인 풍산 홍씨를 중용하면서도 정말 어린 정순왕후 김씨를 맞아드리면서 경주 김씨 가문도 불러일으키는 등 위태위태한 탕평을 이어가게 된다.

영화 사도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다 - 임오화변

영조가 탕평을 활용한 조선 후기 성군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실상 그가 가장 많은 매체에 다뤄지는건 바로 임오화변,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참혹한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물론 임오화변에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나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의심할 만한 행동 등 많은 설들이 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노론과 사도세자의 갈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영조가 아무리 탕평을 실시한다 하더라도 노론과 소론은 물과 기름 같았기에 화목하게 지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와중에 영조가 나라를 다스린지도 언 20년이 지난 1755년 나주지방에 영조를 비난하고 경종의 독살이나 영조의 출생에 관한 의심을 적은 투서가 나주 곳곳에 붙게 된다. 이것이 나주 벽서 사건인데, 조사를 해보니 소론으로 영조가 왕위에 오를 당시 일찍 유배를 떠난 윤지라는 사람이 붙인 것이었다. 이에 영조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분노를 참지 못했고 노론은 이참에 소론을 날려버릴 생각을 한다.

그러나 영조를 대신에 대리청정 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노론의 주장을 받아드리지 않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려 했다. 더군다나 소론, 소북과 같은 세력이 미미했던 당파들이 사도세자에게 가까이 지내길 원하면서 노론은 위기감을 갖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세자라도 처신을 잘하면 다행이지만 내관이나 종을 죽이거나 궁녀들을 마음대로 범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게된다. 물론 이 같이 사도세자가 정신나간 행동을 한 것은 일찍부터 영조가 수도 없이 사도세자를 압박하고 몰아붙이면서 사도세자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겠지만 사도세자를 몰아붙일 생각을 하는 노론에게는 고마운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나이든 영조가 맞아들인 정순왕후 김씨, 동생 화완옹주 등이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낱낱이 고해바치며 이간질하였고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간다. 그런 와중에 노론에서는 사도세자의 비행을 낱낱히 고해바치는 글을 영조에게 올렸고 영조는 분노하며 폐세자는 물론 자결을 명하게 된다. 사도세자가 이를 거부하자 결국 한 여름 뒤주에 사도세자를 8일동안이나 가둬 죽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임오화변이다.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가 묻힌 구리 동구릉


|영조의 집권 말기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그의 아들이자 세손 이산을 후계자로 삼는다. 이후 이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했지만 정조의 반대파였던 홍인한,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등이 반대하면서 잠시 혼란은 겪기도 하지만 홍국영, 서명선 등 정조의 측근이 이를 해결해내면서 정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영조는 1776년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영조는 조선 최고의 장수한 왕으로 무려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며 그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묻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