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논란 속 유일한 기업가 유한양행 유일한갑질 논란 속 유일한 기업가 유한양행 유일한

Posted at 2015. 1. 12. 12:53 | Posted in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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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논란 유일하게 빛나는 유한양행 유일한 선생


최근 여러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몰상식한 행동이 일어나면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사건들이 전하는 상류층들의 졸부 근성은 이미 오래전 부터 고쳐지지 않고 우리 사회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힘 없는 국민으로서는 그냥 한숨만 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와중에 우리나라의 진정한 기업가 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불리며 다시 한 번 재조명을 받고 있는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유일한 선생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한국인이 사랑하는 기업가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 어린시절


유일한 박사는 평양에서 재봉틀 장사로 하고 있던 유기연의 아들로 6남 3녀 중 장남으로 1895년에 태어났다. 당시 평양은 대한민국 기독교의 중심이었고 평양 기독교 대부흥이 일어났던 시기였으며 유일한 박사의 집안도 독실한 기독교 집안중 하나였다. 때문에 아버지 유기연은 당시 교회를 통해 들어와 있던 외국 선교사나 관련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이 같은 영향으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드리기 쉬웠다. 그러던 어느날 유기연은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던 미국 감리교에서 미국으로 향할 조선 유학생들을 뽑는 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1904년 9살이었던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낼 결심을 한다. (유기연은 유일한뿐 아니라 자신의 어린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 곳곳으로 유학보내어 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그 재능을 바탕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유일한은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챙겨준 달러를 배에서 잃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당시 유일한을 미국까지 인도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이를 보았고 박용만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신실한 기독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 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신앙생활은 물론 청렴하고 성실 했으며 유일한을 잘 돌봐주었고 덕분에 유일한은 미국 사회에 잘 적응 할 수 있었다. 


태프트 자매의 도움으로 유일한은 미국의 선진문물을 접하며 성장했으며 1909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유일한은 본격적으로 나가서는 학비를 벌고 오후에는 군사훈련과 학과공부에 임해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겠다는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세워간다. (고등학교 까지 유일한 박사의 원래 이름은 유일형이었는데 신문배달을 하다 미국의 보급소 직원이 일형을 발음하기 힘들어 일한이라고 부른데서 착안하여 조국을 생각하는 의미로 형을 '한(韓)'으로 바꾸자고 결심했으며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승낙을 받았고 아버지 역시 이에 감동 동생들의 이름에 모두 한을 넣어 이름을 바꾸었다.. 매국노들의 창씨개명과는 클래스가 다른 진정한 개명이었다. )


비록 1912년 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지만 독립운동가 박용만을 통해 받은 조국에 대한 헌신과 독립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강해졌고 이는 나중에 기업가로서 자신이 아닌 나라를 위해 적극 투자하고 노력할 수 있는 진정한 기업가 정신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일한 박사의 미소



|유일한 박사 대학시절


유일한 박사는 이후 1915년 헤스팅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트로이트 변전소에 취업, 혼자 학자금을 모아서 미시간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유일한 박사는 공부뿐 아니라 운동 역시 잘해서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는데 서양 학생들과 차이나는 체격과 힘에도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한 것을 봐도 그의 운동실력을 조심스럽게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유일한 박사는 대학을 다니며 꾸준히 무역업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게 된다. 또한 이 같은 소식은 유일한 박사뿐 아니라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동포들에게도 전해져서 동포들은 재미한인전체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세계에 우리 독립을 알릴 대규모 독립선언대회를 계획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4일 부터 16일까지 3일간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대학교 4학년이었던 유일한 박사 역시 참가하여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등 당대 내놓으라 하는 미주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일을 맡았고 곧바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도 참석하였는다. 유일한 박사는 미국에서 열린 우리의 독립운동에 꾸준히 참석하며 미국의 여러 선진제도와 교육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이 같은 영향은 추후 그가 우리나라 교육에 큰 투자를 할 수 있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되었다.



 


누구보다 뜨거운 청년을 보냈던 유일한 박사



|기업가가 되다


1922년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을 했다가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한다. 숙주나물 통조림은 특히 중국계 미국인들에게 큰 관심을 모았고 사업도 나름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유일한 박사는 이 사업을 하면서 중국계 미국인 부인인 호미리 여사를 만나 결혼하였다. 


그런데 유일한 박사는 1926년 돌연  미국에서 잘나가던 사업을 접고 일제치하에 있던 조국으로 귀국하여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세우게 되는 결심을 한다. 유일한 박사가 유한양행을 세우게 된 이유는 라초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있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유일한 박사의 가족은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서 보내는 돈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조차 없는 우리 민족들은 굶주려 죽고 병에 걸려 죽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유일한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시급했던 의약분야를 통해 도움이 되고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기업 설립을 통해 실력양성 경제적 자립을 통한 독립을 하고자 하는 큰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와 미국을 왔다갔다 하며 기업활동과 독립활동 자금 마련 지원 등에 큰 활동을 했다. 


특히 1928년 <한국에서의 소년시절>이라는 책자를 간행해 미국인이 잘 알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풍습과 문화를 소개하였으며 우리나라로 와서는 유한양행을 통해 의약품과 생필품들을 수입 판매하면서 우리 국민을 돌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강화도 화문석, 도자기 같은 우리나라 특산품을 미국에 수출 판매하면서 우리나라를 알리려 많은 노력을 했다.


또한 1933년 유한양행은 처음 개발 판매한 안티푸라민을 비롯해서 판매하였으며 미국에서 소아과 의사로 지냈던 호미리 여사 역시 소아과를 개업해 저렴한 가격으로 환자들을 돌봤다고 전해지며 유일한 박사는 이 가운데에서도 윤리경영을 중시 하여 불법을 단 한번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탈세 역시 단 한 번도 하지 않아서 말 그대로 '털어서 먼지 하나 나지 않는 기업'을 경영했다. 


유일한 박사의 일화


 


1928년 7월 9일 유한양행 신문 광고. 당시 제약회사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정확한 의학적 표현 등 보다는 서로를 비방하고 허위 과장광고 하는 일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유한양행 광고에서 보듯이 그 용도와 이름을 밝히고 의학적 출처와 의학 박사 약제사의 이름등을 실어서 직접 증명하고 투명한 광고를 실행했다.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미지





한 간부가 강력한 진정효과와 진통효과가 있지만 마약중독과 비슷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모르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유일한 회장에게 건의 했지만 유일한 회장은 '당장 회사에서 나가시오'라는 말로 꾸짖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45년 미국 전략정보처가 수립한 OSS 냅코작전계획에 참가하게 된다.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한인을 선발해서 특수훈련을 통해 부대를 육성한 후 한국과 일본에 침투 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고 첩보, 주요기지 파괴, 공작 실시 등을 하는 일급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미국 뿐 아니라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을 이용하여 실시하는 대규모 계획이었고 당시 50살이던 유일한 박사는 강도 높은 훈련을 다이겨내고 이를 통해 1조 조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투입 될 날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이 이어져 실행되지는 못했다. 


당시 OSS훈련책임자는 유일한 박사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그의 회사 간부들 모두가 투철한 한인 애국자였다. 때문에 그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도 있었는데 그는 사업 조직망을 독립운동에 기꺼이 이용하는데 동의 했다" 


이것이 유일한 박사다. 실제로 유일한 박사는 자신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이를 말하지 않았고 그가 죽은지 20년 후 자료가 밝혀지며 이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실제 기사링크 클릭


 


유일한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 정권 시절 정치권 여러곳에서 불어오는 거듭되는 정치자금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때문에 세무조사를 포함한 여러 정치적 방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진행됬던 정치권의 세무조사는 철저한 납세와 윤리경영을 통한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으로부터 그 어떤 꼬투리도 잡지 못했으며 당시 세무조사를 진행했던 감찰 공무원 역시 '진짜 이런 기업이 존재하는 구나'라는 말을 하며 혀를 내둘렀다고 전해진다.



|기업 활동과 유일한 회장의 유언장


1936년에 우리 기업 중 처음이자 당시에는 듣도보지 못했던 종업원지주제를 통해 직원들이 회사의 주식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첫 걸음을 떼었고 1946년 7월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한 유일한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경제에 이바지 하였으며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도 투자를 하였다.


또한 평생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던 유일한 회장은 자신이 모은 모든 재산이 예수님이 맡기신것이란 것을 알았고 1970년 유한재단 설립과 유한공업고등학교, 유한공업전문대를 운영하였으며 경영권 역시 자신의 자식들이 아닌 전문 경영인에게 맡겼다. 1971년 유일한 박사는 별세하기 전에 자신의 손녀딸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하고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하겠다는 유언서를 전했고 회사에서 일어나는 친척들의 분쟁을 막기 위해 모두 내보내는 결단을 하기도 한다.


유일한 박사... 모든 갑들이 꼴갑을 떨고 있을때... 진정한 갑으로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투자하고 살았던 훌륭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상이자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기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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