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왕요 그는 누구인가?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왕요 그는 누구인가?

Posted at 2016. 1. 4. 21:36 | Posted in 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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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왕요 그는 누구인가?


한 왕조의 마지막을 함께 한 왕들은 역사속에서 항상 비극의 운명을 대표하는 인물로 불린다. 500여년의 역사를 한 고려 왕조에도 마지막 왕 공양왕이 있었다. 공양왕 왕요 그는 과연 누구인가?




|공양왕 가계


공양왕은 고려 제 20대 왕 신종의 6세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 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 왕요이다. 그의 가계를 봤을 때 이미 한참은 왕권에서 멀어진 왕족이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 정창군으로 불리며 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왕족으로 살줄 알았는데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1389년 11월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마지막 왕에 오른다. 그의 나이 이미 45세였다. 


이미 그는 형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여 사돈인 관계로 이성계 가문과는 사돈 관계이며 이 점도 분명 그를 왕위에 올리는데 있어 일정부분 힘이 작용했을 것이라 보인다.  


드라마 <정도전>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일찍이 위화도 회군 이후 정권을 잡은 회군파 이성계와 조민수는 자신들이 몰아낸 우왕 대신 차기 왕 후보에 대하여 고심을 한다. 이성계 일파는 종친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자고 하였으나 조민수 쪽에서는 자신들의 패권을 위하여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위에 올련다 주장하였고 고려말 대학자이자 정도전과 정몽주의 스승인 이색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도움요청을 받은 이색은 이내 공민왕의 제 3대 익비 한씨를 찾아가 교지를 받아 창왕을 왕위에 세우니 그가 바로 제 33대 왕 창왕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민수 일파에게 권력이 기울여지는 듯 보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정도전, 조준 등 젊은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대규모 토지 개혁을 단행하려 한다. 


그리고 조준을 필두로 관제, 신분, 국방 등 그야말로 고려 사회를 뒤집어 엎는 개혁안과 1388년 7월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 개혁소를 올렸고 조민수는 이를 끝까지 반대하다 이인임과 친척관계로 부정한 짓을 하였다는 조준의 탄핵을 받아 유배 된다. 


조민수가 유배를 당하자 군권이 없어진 이색은 힘이 줄어들었고 문하시중 자리와 이림, 우현보, 변안열, 권근 등 그의 제자들이 겨우 지탱하면서 전제개혁을 막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색 역시 조준이 대사헌 자리에 오르면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물러날 위기에 처하고 마지막으로 명나라의 힘을 이용하고자 창왕의 명나라 입조를 추진하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스스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색마저 고향으로 내려가자 정권은 완전한 이성계 일파의 것이 되었고 조준, 정도전 등은 정몽주와 함께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의 논리로 창왕을 폐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저와, 정득후 등이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다가 그가 매수하려던 곽충보의 밀고로 발각되어 실패하고 국문 결과 변안열, 이림, 우현보, 왕안덕 등 반이성계파가 대다수 연루되었다는 자백과 함께 모두 척결한 후 1389년 11월 창왕을 폐위한 후 강화도로 보내버린다. 


이에 이성계파는 자신들이 원래 세우려 했던 정창군 왕요를 불러들여 왕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공양왕이다. 


  

|공양왕 개혁의 폭풍 속에서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왕위에 올리자마자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하기 전 유배보낸 우왕과 창왕을 죽여야 한다고 공양왕에게 거듭 주장을 하고 공양왕은 고민 끝에 하는 수 없이 우왕과 창왕을 죽이게 된다. 이후 공양왕을 즉위시킨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 아홉 명의 대신 들은 공신 자리에 주어져 그야말로 급진적인 개혁에 나서게 된다. 

우선 정치에서는 경연제도를 도입하여 정치논쟁을 활성화시키고 과거에 무과를 신설하여 군대의 질을 늘리게 된다. 여기에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조로 관제를 개편하고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이념에 따라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하고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로 환수 하였다. 

경제 개혁으로는 의창을 세워 곡식을 비축하게 하고 조준의 주장에 따라 현 전직 관리의 직급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과전법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신흥 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도선비기에 따라 1390년 도읍을 한양으로 옯겼다가 민심이 동요되자 개성으로 환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개혁속에서 공양왕은 정몽주, 이숭인, 이종학 등 온건개혁파를 의지하게 되는데 이성계 일파의 경우 궁극적으로는 고려 왕조를 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에 목적이 가있었고 정몽주가 이끄는 온건개혁파의 경우에는 고려 왕조를 그대로 지키고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양왕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폐위되다.

공양왕이 이처럼 정몽주 등과 협력하며 겨우 왕조를 지탱하면서 틈틈히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는 사이 1392년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하러 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낙상하여 등청하지 못하는 기회를 잡게 된다. 

이에 정몽주는 4월에 조준, 남은, 정도전, 남재, 조박, 오사충 등 급진파를 모조리 탄핵하여 공양왕에게 교지를 받아 유배시켜버렸다. 이때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더 멈추지 말고 이성계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으나 공양왕이 우물쭈물 대는 사이 이성계는 아픈 몸으로 가마에 실려 부랴부랴 개경으로 돌아와 사태수습에 나서게 된다. 

여기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온건개혁파의 정몽주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수하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살해하게 되니 온건개혁파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모두 유배길에 올랐으며 유배를 떠났던 급진개혁파 조준, 정도전 등은 다시 돌아와 정계를 장악한다. 이후 1392년 7월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니 고려는 멸망하고 1393년 2월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된다.

<공양왕 능 출처:dvdprime.donga.com>


|공양왕 최후 

공양왕은 왕위에서 쫒겨 난 후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간성으로 이배되었으며 그 후 다시 삼척으로 이배됐다가 태조의 명령에 의해 1394년 4월 50세로 사사 되었으며 1416년(조선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원당과 사사지인 강원도 삼척 두곳에 있는데 원당에 있는 고릉에는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나 삼척에는 비석은 없고 공양왕이라는 말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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