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국보 1호 숭례문 수난사

윤여시 2014. 8. 22.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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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호 숭례문 수난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보 1호 숭례문.. 국보 2호, 3호부터는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나 거의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은 국보 1호가 숭례문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숭례문은 우리 국민에게 소중한 보물이다. 숭례문이 세워진지 700여년 안타까운 숭례문 잔혹사를 살펴보자




 

밤이 되면 더 아름다웠던 숭례문

 

|숭례문에 대해서


숭례문은 조선의 새 도읍지로 한양이 선택되고 경복궁을 중심으로 세워진 사대문 중 가장 남쪽에 세워진 문이다. 하지만 일제때 남대문이라 불리며 주구장창 남대문으로 불리다가 요즘에는 많은 국민들이 남대문 대신 숭례문이라는 소중한 우리의 이름을 되찾아서 사용중이다. 


숭례문의 이름은 예를 숭상한다는 조선의 유교 이념에서 나온 뜻 이전에 오행사상을 따라 지은 것이며 흥인지문의 '인(동)', 돈의문의 '의(서)', 숭례문의 '례(남)', 숙정문의 '지(북)', 보신각의 '신(중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숭례문의 상징 현판은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큰 형인 양녕대군이 썼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숭례문은 처음 도성이 만들어 졌을 때 모습이라기보다는 세종대왕 때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 되었다.



 

첫 번째 숭례문의 시련



|숭례문 수난사 첫 번째 일제시대.


사실 숭례문은 조선 왕조 내내 별 탈 없이 도성의 남쪽을 지키는 튼튼하고 믿음직한 문이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도 숭례문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조선 한양의 친근하지만 위대한 문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끝나갈 무렵 숭례문의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온다. 가장 먼저 1898년 12월 종로와 용산을 잇는 전찻길이 숭례문을 관통하면서 선로가 놓여진다. 사실 이때만 해도 문 구실은 하긴 하고 있었다. 그러다 1904년 숭례문 앞에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선로가 만들어지면서 두개의 전차 선로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번잡한 도로가 된다. 


그러다 1907년 이미 일제에 나라를 갖다 바치기로한 신하들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숭례문에 이어졌던 도성의 성곽을 없애자고 건의한다. 결국 이를 받아들인 고종은 숭례문의 성곽을 철거하는데 이는 조선왕조가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뜻하는 바이기도 했다.





숭례문의 성곽이 헐리고...

 


그리고 얼마 후 일본 황태자가 방한을 하면서 "대일본의 황태자가 문루를 지날 수 없다"며 서울 성곽 허물기가 가속화 되었고 숭례문 앞뒤로 봉영문이라는 문을 세워 숭례문의 상징성을 깎아 내렸다. 


이후 1909년에 숭례문 성곽의 좌우 모두 철거가 완료 되었으며 전차의 선로를 양 옆으로 옮겨 숭례문을 지나가게 했다. 이후 우리의 국권이 빼앗긴 일제강점기에 숭례문은 치욕적으로 일제의 분위기에 맞춰 변해야 했고 박람회장의 출입구로도 쓰여야만 했다.





박격포에 맞은 숭례문


|숭례문 수난사 두 번째 6.25 전쟁


일제의 잔혹했던 상징성 없애기에 희생양이 된 숭례문은 해방 후 다시 그 기운을 되찾나 했다. 그러나 형태를 유지하던 숭례문에게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이다.


6.25전쟁 초기만해도 숭례문의 피해는 그리 강하지 않았으나 서울을 두고 전투가 지속되면서 무분별한 총격전이 숭례문을 훼손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숭례문을 향해 날아든 박격포 공격은 숭례문의 성루와 정면을 일부 무너트려 놓았다. 일제시대에도 그나마 지키고 있었던 형태마저 포탄에 의해 훼손된 것이다. 이 같은 숭례문은 위태하게 서있다가 전쟁이 끝난지 1년 후가 되서야 숭례문의 복원작업이 시작되었으며 1961년 해체수리를 거쳐 2년동안 진행되었다.




 

숭례문과 국민의 마음이 함께 재로 변하다.


|숭례문 수난사 세 번째 숭례문 방화사건 


숭례문이 남대문이라 불리던 시절을 쭉 거쳐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버텨오던 숭례문에 정말 안타깝고도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쯤이 되었을까? 토지보상 문제를 놓고 정부에 앙심을 품은 방화범 노인 채종기가 항상 그자리에 서있던 국보 1호에 침입한다. 이후 숭례문 2층 누각에서 불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소방관들의 노력에도 화재 진압을 하지 못하고 숭례문은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0시 25분경 2층 모두 화염에 불타기 시작했고 58분경 2층이 붕괴한 뒤 1층까지 불이 옮겨붙어 새벽 1시 54분에 숭례문을 받치던 성곽만 남겨 놓고 모두 전소 된다.


사실 국보 1호라는 숭례문의 상징성 때문에 소방관들이 훼손을 우려 적극적으로 화재진압에 나서지 못했고 화재초기 목재 기와가 육안으로 더 이상 타지 않는 것 같은 상태가 되자 잠시 주춤 했던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이후 숭례문은 철골에 갇혀 외부와 차단된채 5년이라는 복원 단계에 접어들게 되고 2013년 5월 4일까지 긴 잠에 빠지게 된다.




 

복원된 숭례문



|숭례문 수난사 네 번째 부실공사에 얼룩진 숭례문


2013년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숭례문 기념 행사와 함께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숭례문을 보며 이제는 숭례문이 행복할 것만 같앗다. 이번에는 훼손되었던 성곽까지 제법 갖추고 돌아왔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은 다시 한 번 숭례문에 대해 애틋함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난다긴다 하는 장인들이 참석해서 만든 숭례문은 현대사회의 값싼 경제논리에 빠져 부실공사와 비리에 얼룩지게 된다. 먼저 숭례문의 아름다운 단청이 2013년 11월 부터 곳곳에서 갈라지기 시작한다. 전통기법이 아니라면서 동유를 쓰며 단청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700년의 기술을 무시한 댓가를 톡톡히 치뤄야만 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숭례문은 비리의혹에 또 다시 휩쓸린다. 전국곳곳에서 숭례문 건조에 쓰라며 보내진 금강송들이 값싼 러시아 소나무와 뒤바뀌어 쓰였다는 의혹이 나온것이다. 물론 숭례문 기둥 곳곳에서 갈라짐 현상이 있었고 검찰은 전격적으로 숭례문 건조와 관련한 비리 조사에 착수한다. 문화재청은 연륜연대학 전문가 박모교수에 현상 조사를 위한 의뢰를 부탁하였지만 박모교수는 나이테 분석을 통해 19개 중 7개가 의심스럽다며 인터뷰를 하고  하루 뒤에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때문에 아직도 숭례문 부실 복원에 관련해서는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은 상태다.


숭례문은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항상 그 때를 같이해왔다. 말도 안되는 숭례문 방화와 복원 이후에 벌어진 비리는 우리나라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며 숭례문은 분명 이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 된다.


보면 볼 수록 이제는 애틋하기만 한 숭례문...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우리와 영원히 행복하게 함께 있어야 할 중요한 역사이자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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