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서양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윤여시 2014. 12. 1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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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지금도 뱅글 뱅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사실로 아무도 부인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히 확인된 사실도 인정되지 않던 그 옛날,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1642)

 


|갈릴레오 유년시절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으로도 유명한 이탈리아 피사 지방의 몰락 귀족 피레네 가문에서 태어났다. (갈렐레이의 이름과 성이 비슷한 것은 당시 맏아들의 이름은 성을 겹쳐 쓰는 피사지방의 풍습 때문이다.)


갈릴레이의 아버지 빈첸초 갈렐리이는 류트라는 악기를 다루는 유명 음악가였지만 집의 가세가 기울면서 자존심을 버리고 옷감 가게를 차려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후 갈릴레오가 열살때 피렌체로 이사를 가게되고 그곳에서 수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키웠지만 집안의 경제에 도움이 되고자 열일곱살의 나이로 의학공부를 위해 피사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피사의 사탑


|갈릴레이 대학시절


애초에 갈릴레이가 피사 대학에 입학할 때 어쩔 수 없이 의사를 꿈꾸며 입학하긴 했지만 갈릴레이는 자신이 더 관심이 있던 수학이나 물리학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갈릴레오의 아버지 친구인 피사 대학의 기하학 교수 리치교수와 만나게 되고 이후 본격적인 수학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갈릴레오는 원래 성격이 독설을 잘하고 자신이 맞는 것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격은  그의 대학생활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학에서 학생들간의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에 관한 토론이 열린 어느날,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만 무조건적으로 믿으며  "땅으로 떨어지는 물체의 속도는 그 물체의 무게에 비례한다. 어떤 돌보다  열 배 무거운 돌은 열배 빠른 속도로 추락한다" 라는 주장을 하는 다른 학생들의 의견에 정면 반박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대학자의 주장을 너가 뭔데 반박을 하냐'며 논쟁이 붙었다. 덕분에 갈릴레오는 대학내에서 싸움닭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학교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후로 갈릴레오는 이론 공부에만 심취하는 것이 아니라 꼭 직접 실험을 해보는 습관을 갖고 자신이 눈으로 확인하는 습관을 가졌다고 하니 갈릴레이의 성격을 잘 드러대는 대목이다. 





갈릴레이가 밝혀낸 '흔들이의 원리'를 이용해 

사용되어지고 있는 괘종시계


|갈릴레이 '흔들이의 원리'


천재들은 사소한 어떤 것도 사사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가? 갈릴레이는 성당 천장에 매달려 있는 램프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좌우로 흔들리는 시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흔들리는 폭이 줄어들어도 왕복하는 시간은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를 실험을 통해 확신을 얻게 되자 리치교수를 찾아가 원리를 설명하고 실험을 통해 답을 보여준다. 


그는 이 원리를 통해 흔들이의 일정한 운동시간을 통해 의사가 환자의 맥박을 정확하게 잴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고 이를 '펄시로기아' 라고 불렀으며  그 뒤에도 이 기구는 널리 쓰이게 되었다. 또한 이때까지만 해도 해시계, 물시계 등으로 시간을 구분 해야 했지만 이 원리를 통하여 톱니바퀴 시계와 추시계등이 발명되게 된다. 오늘날의 괘종시계도 이 원리를 통해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 때 갈릴레이의 나이는 불과 19살이었다.




 

갈릴레이 집이 있던 피렌체


|갈릴레이 대학교수 시절


이러한 발견에도 갈릴레오는 학비조차 댈 수 없을 정도로 집안의 가세가 기울게 되자 4학년때 학교를 그만두고 피렌체로 돌아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하면서 수학 과외와 간단한 의료활동을 통해 돈을 벌게 된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대학은 그만 두었으나 개인적인 공부와 실험은 손에서 놓지 않았고 물건의

무게와 그것과 똑같은 부피의 물의 무게를 비율로 나타낸 비중저울을 만들어내는 등 그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물론 갈릴레이는 그러는 동안 대학의 교수직을 얻기 위해 몇몇 대학에 편지를 보내며 배움의 끈을 놓치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자신이 그만 둔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에 임용되었다. 


갈릴레이는 젊은나이에 교수로 임용되어 수업 중간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주장을 서슴없이 지적하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절대 이를 멈추지 않았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피사의 사탑에서 나무공과 쇠공을 투하해 동시에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여준 실험을 진행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갈릴레이의 이 같은 주장은 이후 뉴턴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갈릴레이가 교수로 있던 파도바 대학


|갈릴레이 파도바 대학교수 시절


시간이 흘러 갈릴레이는 파도바 대학교수로 임용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당시 막 개발 되던 망원경을 접하게 되었고 갈릴레오는 이것을 개량시켜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개량작업을 성공시켰다.


갈릴레이는 이 망원경을 통해 전에 접했던 지구도 우주를 다른 행성처럼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더 큰 확신을 얻게 된다. 그는 밤하늘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게 되고 당시까지만 해도 정설이었던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관념을 철저하게 깨부수는 결과를 담아낸 <별세계의 보고> 서적을 발간하게 된다. 


또한 갈릴레이는 이같은 발견을 통해 당시 피렌체의 대귀족 메디치가문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임명되며 수입과 사회적 지위도 얻게 된다.   




 

갈릴레이와 대립했던 교황청


갈릴레이는 이러한 발견에도 천문에 대한 관찰을 멈추지 않고 태양흑점 발견과 관련된 내용인 <태양 흑점에 관한 서한>을 발표 하였고 이는 곧 우주의 태양을 중심이론을 비판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비난을 사게 된다.

당시 일어났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교황청은 이러한 발표에 민감하게 대응했고 원래 자신들이 알고 주장했던 지식이 아닌 갈릴레이의 이 같은 새로운 주장들 역시 모두 좋지 않게 봤다. 때문에 갈릴레이는 여러번 이단 심문과 재판을 받아야 했으며 갈릴레이는 이같은 재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재판이 끝나면 죽을때까지 강의와 저서 발간을 통해 당시 퍼져 있던 천동설에 대한 오류를 비판하였고 재판을 마치고 재판소를 나올 때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한다. 물론 이 명언은 많은 이후 많은 과학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명언이 되었지만 실제로 갈릴레이가 이 말을 했는지는 알수 없다. 여튼 이러한 갈릴레이의 교황청과의 대립은  그가 죽은 뒤 320년 후 1992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이에 사과를 전하며 더 잘 알려지게 된다. 

갈릴레이가 물리학, 천문학 등에서 세운 업적은 분명 인류 역사에 획을 그을 정도의 위대한 발견이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갈릴레이의 이미지가 마치 과학을 위해 종교와 관련한 순교자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으며 그를 올바른 것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위인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벽에 순응하면서 끊임 없이 자신이 알고자 했던 새로운 지식들을 탐구한 인물로 보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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