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억울한 죽음 남이 장군너무도 억울한 죽음 남이 장군

Posted at 2015. 2. 20. 22:30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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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억울한 죽음 남이 장군


조선에서 역모죄는 말그대로 삼족을 멸하는 대죄였고 이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중에는 나라를 위하는 충신이자 능력 역시 출중한 인물이 많았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남이 장군이다.




남이장군 초상화



남이 장군 초상화

 


|남이 장군 가문과 성장


남이는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 영의정부사 남재의 자손으로 그 할머니는 태종 이방원의 딸 정선공주이며 그 할아버지는 의산군 남휘이다. 또한 남이의 부인 역시 세조를 왕위에 올리는데 공을 세운 좌의정 권람의 딸이었다. 물론 부인 권씨와 권람이 일찍 죽었긴 했지만 그 가문은 당시 조선 최고의 가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남이의 출세는 이미 예견 되어 있는 듯 보였다.


더군다나 남이는 그 재능과 총명함 역시 남달라서 1457년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했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1466년 발영시 급제는 물론 1467년 경기도 북부지역의 난립하는 도적떼를 섬멸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남이의 묘와 무속신앙에 등장하는 남이장군


|이시애 난 제압과 승승장구 


이시애의 난은 조선 세조 때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이다. 세조가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가장 관심이 많았던 부분은 왕권 강화였는지라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 하고 경관으로 대체 하였으며 수령들에게 지방 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를 감독하게 해서 수령과 유향소와 갈등이 계속 일어났다.


이들중에 희령부사를 지내다가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과 그 지역 백성의 감정을 등에 업고 아우 시합, 매부 이명효와 반역을 모의했고 1467년 세조13년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함길도의 절도사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며 모함한 후 절도사 강효문, 설징신을 죽이고 남도의 군대가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죽인다는 소문을 퍼트려 함경도 백성을 선동한다.


이에 함경도 전체가 혼란에 빠졌으며 서울의 한명회, 신숙주 등이 병마절도사 강효문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며 모략전술을 펼쳤고 세조는 급한 나머지 신숙주를 잡았다 풀어주는 등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속았다는 것을 안 세조는 곧바로 허종,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이끄는 3만 군대를 토벌군으로 삼아 보내게 된다. 이시애는 급한 나머지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맞서 싸우려 했으나 주력부대가 분쇄 당했고 여진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는 자신의 부친이 이시애에게 억지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주, 황생 등을 설득하여 이시애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넘겼고 이시애는 토벌군 진지에서 바로 목이 잘리면서 그 난이 평정되었다.


이시애난이 진압된 이후 토벌군을 이끌었던 구성군 준과 조석문, 어유소, 허종, 허유례를 포함 남이까지 공신으로 녹훈되었으며 남이 역시 이후 승승장구 하게 된다,


남이는 이후에도 여진족을 토벌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1468년 오위도총부(현 참모총장)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이어 곧바로 세조의 파격적인 대우에 힘 입어 병조판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남이 장군의 호기가


|남이 장군의 위기와 죽음


세조를 왕위에 올린 공신들이었던 한명회, 신숙주 등의 세력을 두려워하게 할만큼 젊은 나이에 조선의 병권을 틀어쥔 자리에 오른 남이의 그 영원할 것 같았던 권력은 세조가 죽음을 맞이 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세조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대신들은 한데 입을 모아 젊은 남이는 병조판서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며 깎아 내리기 시작했다. 세조와 달리 우유부단했던 예종은 공신들의 눈치를 보느라 남이를 병조판서직에서 내려오라 명령한다.


병조판서의 자리에서 내려온 남이가 궐에서 숙직을 하다가 우연히 밤하늘에 혜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고 남이는 '혜성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 라는 혼잣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를 희대의 간신으로 평가 받는 유자광이 듣게 되었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웠으나 남이가 승승장구 하는 것을 평소 좋게 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여튼 유자광은 남이의 말을 기억했다가 예종에게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때를 이용하여 거사하겠다" 라는 말로 바꾸어 고하고 예종은 분노해 남이를 하옥시키고 말도 못할 고문을 한다. (예종은 세조때부터 자신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아온 남이를 그렇게 좋지 않게 보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남이는 한때 세조를 함께 도왔던 자신의 장인 권람의 친구들인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이들은 외면하고 심한 고문을 참지 못한 남이는 어쩔수 없이 역모를 고백하면서 강순 (일각에서는 남이와 상관도 없던 당시 나이 79세의 노신 강순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고문을 참지 못한 남이가 강순과 함께 반역을 꾀했다고 전하자 강순은 "왜 아무죄도 없는 나를 끌어들였냐고" 물었고 이에 남이는 "재상이 되어 나의 원통함을 알면서 한마디도 도와주지 않으니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 등과 함께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남이를 변호하던 조숙 역시 처형 당했고 남이의 어머니 역시 연좌되어 목숨을 잃었다. 남이의 나이 이때가 27살이었다.


한편 유자광은 이 공을 인정 받아 정난공신 1등에 책봉 되었다. 물론 이러한 남이의 역모사건에 대해 반론도 있으니 실제로 남이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며 도중에 유자광을 잘 못 포섭하였다가 유자광이 밀고하여 남이의 역모가 실패하였다라는 반론도 있다. 한편 한명회는 남이 강순 등의 재산과 처첩들을 내려달라고 주청해 그 재산과 70여명의 처첩을 나누어가졌으며 훈구 대신들의 세력은 아무도 견제할 수 있는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1818년인 순조18년에 남이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명예를 되찾게 된 남이는 충무라는 시호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남이 장군 전설


남이는 그 억울한 죽음만큼이나 오랫동안 귀신이 되어 우리 민속신앙에 자주 등장하는 장군으로 실제 그 전설 역시 많은 인물 중 하나다.


그 중에서도 남이 장군이 권람의 딸과 결혼하게 된 전설이 내려오는데 남이 장군이 소년시절 길에서 나가 놀고 있는데 어떤 작은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들고 가길래 살펴보니 그 보자기에 요사스런 잡귀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하인이 권람의 집에 들어갔고 남이는 신기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안에서 곡성이 나는 것이었다. 


영문이 궁금해진 남이가 알아보니 권람의 집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남이는 잡귀의 짓이란 것을 알고 있던지라 하인에게 "내가 그 처녀를 살리겠다"고 말했고 권람의 집에서는 이같은 남이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이를 들여 보냈고 남이가 딸의 방에 들어가보니 잡귀가 그 딸의 가슴 위에 눌러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에 남이는 그 잡귀를 쫒아내었고 신기하게도 그 딸이 차차 눈을 뜨더니 살아났다.


그런데 남이가 딸의 방에서 나오면 다시 딸이 죽고 남이가 다시 딸의 방에 들어가면 다시 딸이 살아나는 묘한일이 계속 되었고 남이가 아까 하인이 보자기에 싸온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조금 전에 가져온 홍시를 권람의 딸이 먹자마자 기절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남이는 자신이 귀신을 보았던 일을 모두 권람에게 말하고 약을 짓게하여 그 딸을 살리게 되었으며 이후 권람이 자신의 딸을 남이에게 시집보냈다는 일이 전해지고 있다. 


남이 그 억울한 죽음은 조선시대의 억울함 중에서도 단연 1등이라 할 수 있으며 27세라는 나이에 병조판서는 물론 역모죄로 죽음을 맞는 비극적인 운명까지 겪게 되었으니 조선을 대표하는 최대 비극적인 드라마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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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나 지금이나 그렇고.
  2. 역사학도
    정정하실 내용이 있습니다.
    맨 위에 쓰신 초상화는 남이가 아니라 남이흥의 초상화입니다.
    남이 장군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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