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주인공 조선의 폭군 연산군

윤여시 2013. 10. 1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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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주인공 조선의 폭군 연산군

아마 어떤 왕조건 세계의 어떤 역사건 꼭 폭군은 존재하는데 조선의 대표적인 폭군은 바로 연산군이다.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조선의 왕 연산군.. 사화를 두번이나 일으키며 재위기간 살육은 물론 정치는 나몰라라 했던 연산군. 폭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산군의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자.

 

 

영화 <왕의 남자> 속 연산군 

 

성종과 사약을 받고 사사 당하는 폐비 윤씨(폐비윤씨에 대해 알아보려면)에게는 아들 융이있었다. 융이 네 살때 폐비윤씨가 궁에서 쫒겨났으니 그는 새로 들어온 정현왕후가 어머니인 줄 알고 자랐다. 그러나 왕자 융은 새로 들어온 정현왕후를 잘 따르지 않았고 정현왕후 역시 사랑으로 융을 돌보지 않았다.

정현왕후 윤씨와 마찬가지로 그 할머니 인수대비 역시 자신의 손자이자 왕위를 이어받을 장자인 왕자 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생김새와 걷는 모습이 자신이 쫓아낸 폐비윤씨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는 인수대비에게 항상 왕자 융의 잘못을 고해 바쳤고 어릴 때부터 왕자 융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자라게 된다

더군다나 정현왕후 윤씨가 아들인 진성대군을 낳으면서 그 차별은 더더욱 심해졌는데 이러한 이유때문인지 왕자 융은 괴팍하고 성질이 사나워지며 크게 된다. 더군다나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나가 놀기 좋아했으며 고집이 강했다.

연산군 일화 1.

왕자 융은 세자 시절에 두명의 스승을 두게 되는데 바로 조자서와 허침이었다. 조자서는 성격이 대쪽 같아 왕자 융의 잘못된 행동을 강하게 다스렸고 성종에게 고하겠다고 까지 말하는 위인이었다 그리고 다른 스승인 허침은 부드러운 사람이라 늘 다정한 얼굴로 융을 대했는데 그래서 융은 허침을 좋아했고 조자서는 싫어 했다. 그래서 왕자 융은 장난으로 조자서는 큰 소인이고 허침은 큰 성인이라는 낙서를 벽에다 하게 되는데 조자서는 이 같은 행동을 한 왕자 융을 더욱 강하게 혼냈고 융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조자서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다짐을 할 정도로 그 성격이 좋은 왕이 될 성격은 아니었다.

 

 

연산군.. 그가 폭군이 되기까지...

 

또한 성종 역시 연산군을 그리 좋게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종이 융과 함께 궁의 뜰을 거닐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슴에게 다가가 풀을 주었는데 왕자 융도 그것을 따라 했다. 그 순간 사슴이 먹이를 받아먹다가 융의 손을 핥으려고 했고 왕자 융은 사슴의 배를 발로 차버린다. 이를 목격한 성종은 동물 역시 사랑으로 대해야 된다고 말했지만 융이 왕이 될 재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종에게는 자신의 왕의 자리를 이어 받을만한 나이의 왕자들이 따로 없었기에 왕자 융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때 그 어머니 인수대비는 끝까지 융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으나 결국 왕자 융이 세자가 되고 성종은 38살의 나이로 죽자 19살의 나이로 왕자 융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바로 조선 제 10대왕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초반에는 그 아버지 성종이 잘 만들어 놓은 태평성대에 별 어려움 없이 나라를 운영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점점 갈수록 연산군의 내면이 들어나기 시작한다. 

 

 

연산군 두번의 사화를 일으키다. 

무오사화

 연산군은 학문을 어릴때부터 싫어하였고 그의 그릇된 행동을 말하는 신하들 역시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자신에게 끊임 없이 간섭하던 사림세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때 간신 유자광을 중심으로한 훈척세력이 불을 붙이게 된다. 사건은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데 실록청이 세워지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하게 된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하는 것에 대한 제문이었는데 여기서 김종직은 이를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대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이극돈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가한 상소문을 보고 분노했고 훈신세력을 주도하던 유자광을 찾아가 이를 고하게 된다.

유자광 역시 김종직을 싫어하던 터라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사등의 훈신세력과 모의하여 조의제문을 예로 들으며 연산군의 할아버지 세조를 비방한 글이라며 대역죄를 덮어 씌운 것이다. 연산군 역시 평소 사림을 귀찮아하고 싫어하던 터라 이 같은 명분에 옳다구나 하고 김일손을 문초하고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제거 하기 시작했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형을 가했다. 또한 이때 대부분의 신진 사람이 죽고 유배당하며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에 조정은 노사신등의 훈척 계열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살육당했다하여 무오사화라고 불리게 된다.

 

 

드라마 인수대비 속 연산군의 모습 ! 자신의 할머니가 죽는데 일조를 한다. 

갑자사화

무오사화가 지나고 몇년 후 이제 자신에게 옳은 말을 하던 사림 세력이 없자 연산군의 폭정은 나날이 심해져 간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 폐비윤씨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렸을 때 차별 받던 그 순간들을 잊지 않았고 삻았을 것이다. 폐비 윤씨에 대해 아무리 쉬쉬해도 분명한 것은 연산군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외할머니가 찾아와 폐비윤씨가 사약을 받을때의 피묻은 적삼을 전하자 연산군이 그때 알았다고는 했지만 10년동안의 재위기간 동안 이 같은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는데 동의 하므로 드라마적 요소는 재외하겠다.

자 여튼간에 이번 자신의 생모 폐비윤씨에 대한 보복심은 왕권강화와 정권 장악을 위한 계산적인 생각과 맞물리며 조선시대 최대의 사화가 된다. 일단 윤씨 폐출에 관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 정귀인을 직접 참하고 그 아들을 귀양보내 사사시킨다. 또한 폐비윤씨를 내쫒았던 자신의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 받았으며 인수대비는 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후 죽게 된다. 

그는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조정을 장악했던 훈척세력마저 척결하고 한명회 같은 세조시대 공신들도 부관참시에 처했다. 239명이 이 사화에 휩쓸리게 되었고 그 중 반이 넘는 대신들이 사형을 당하는 엄청난 살육이었다.

 

 

 

연산군... 그도 이제는 안녕...

 이제 훈척세력마저 다 죽이며 유아독존의 자리에 오르게 된 연산군은 당시 문신들의 충고가 귀찮다며 사간원, 홍문관을 업애버리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자신의 행동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은 가차 없이 숙청해버린다. 또한 정사는 뒷전이고 방탕한 생활을 보내며 연회를 열었으며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의 충격적인 패륜 범죄를 벌이게 된다.

이에 조정은 더 이상 연산군을 두고 볼 수 없었고 반정을 모의하게 되는데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위에 옹립하게 된다. 연산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낮춰지고 강화도로 유배되는데 그곳에서 그해 11월 3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렸을 때 부터 사랑도 하나 받지 못하고 자란 그였기에, 어쩌면 두번의 사화와 폭정은 예견 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 미치광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편 하나 없는 조정에서 왕권을 지키고 간섭 받지 않으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여튼 조선의 대표적 폭군 연산군..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그 이기에 만약 폐비윤씨가 살아서 키웠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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