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서애 류성룡 징비록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14. 10. 19.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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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 징비록 그는 누구인가?


이순신 장군의 친구로만 잘 알려져 있는 류성룡.. 그러나 그는 학자로서 또는 정치가로서 이순신 장군의 친구이기 이전에 분명 다시 재평가 되야 하는 인물이기도하다. 무능한 선조와 당파싸움에 눈이 멀었던 조정대신들 속에서 빛났던 한 인물 류성룡은 누구일까?





국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그리고 류성룡 둘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류성룡의 출생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난 류성룡은 외가인 경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류성룡은 이미 4살때부터 글을 깨우친 천재중의 천재로 21세에 그는 형 유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 형제 둘 모두 워낙 영특해서 이황의 제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류성룡을 보고 이황이 천재라 극찬을 했을 정도였다.


류성룡 역시 당시 조선의 대학자였던 퇴계 이황을 존경하여 이황의 학문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며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했으며 이는 류성룡이 평생을 사는데 있어서 항상 영향을 끼쳤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류성룡 역을 맡은 이재룡

 


|임진왜란 발발 전의 류성룡의 정치생활


1564년 명종때 이미 24살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며 1569년 명나라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갔다. 이때 명나라에 사는 지식인들도 류성룡의 인품과 지혜에 감탄하며 그의 호를 따 서애 선생으로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초반 정치 인생은 나름 탄탄대로를 향해 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탄탄한 집안배경은 물론 당시 퇴계 이황의 제자 출신이란 것이 컸을 듯 싶다. 여튼 30세에 병조좌랑 그리고 이조좌랑을 거치다가 1573년 부친상을 당해 3년동안 아버지 묘 옆에서 지내고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980년 부제학은 물론 1590년 우의정의 자리에 오르며 그야말로 왕 밑의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사실 이러한 과정속에서도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의 심화로 동인과 서인이 끊임 없이 대결하는 구도가 이어졌는데 이러한 혼란속에서 류성룡은 이산해등이 있는 동인에 속하여 서인의 끊임 없는 견제속에서도 영의정 그리고 이후 좌의정의 자리까지 오르니 선조의 류성룡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서인 정철이 세자 책봉에 대한 말 한번 잘 못 꺼냈다가 귀양을 가게되고 같은 동인이었던 이산해는 강경처벌을 하자는 강경파로 류성룡은 그의 처벌에 대한 온건적인 입장을 취하는 온건파로 다시 파가 나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이산해는 류성룡의 정치적 정적이 되게 된다. 이처럼 당시 영원한 아군도 적도 없는 상황에서 좌의정 류성룡에게도 끊임 없는 정치적 적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류성룡이 입었던 철갑과 투구

 


|임진왜란 발발직전 류성룡


1591년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파견된 황윤길 김성일 등이 돌아왔다. 황윤길은 일본의 실정과 형세 그리고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보고와서 조정에 " 앞으로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으나 김성일은 "전혀 그런 조짐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류성룡을 비롯한 동인 조정은 김성일의 편을 들어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를 안했고 후에 황윤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선조가 후회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류성룡은 상반된 보고 직후 김성일에게 왜적이 나오지 않는 것을 확신 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고 "김성일은 단지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 할까봐 그것을 없애주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유성룡은 신립이나 이일등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군사와 군비태세를 점검하게 했고 하급관리였던 이순신 장군을 초고속 승진시켜 전라좌수사를 맡게 했으며 행주대첩의 권율 등을 통해 군대를 정비하게 했으며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비확장에 힘쓰는 등 전국적인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이것을 보면 분명 류성룡 역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예측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분명 이런부분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고찰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세 번째 이지스함 서애 류성룡함. 전쟁에 대한 탁월한 인물배치로

대비하고자 했던 류성룡의 이름을 붙였다.

 


|임진왜란 중의 류성룡 


1592년 마침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류성룡은 51세의 나이에 선조에게 병조판서를 임명 받고 조선군에 대한 총책임을 맡기도 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전쟁초 패전으로 파직 되었으나 다시 벼슬에 올라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의 도체찰사로 전시의 모든 상황을 점검 통솔하게 되는 역할을 맡는다. 


이때 류성룡은 전쟁 후 선조의 피난길에 함께 하며 조정의 압록강 넘어 도망가자는 의견에 홀로 반대하며 선조를 안심시키고 의주로 향한다음 명나라의 군사적 원조길을 열어 놓는다. 이후 억울하게 탄핵되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끊임 없이 천거했으며 조선의 구원병으로 들어온 명나라의 군대와 장군을 상대하며 외교관계에도 앞장섰다. 


또한 그는 전란중의 사회, 경제도 돌보았는데 이미 잃어버린 조선 조정에 대한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공을 세운 사람에게 신분 상승까지 보장하는 파격적인 포상제는 물론 군사비를 제외한 공출을 줄여 백성에게 혜택을 돌아가게 했다. 이는 전란을 승리하려면 결국 조선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정확한 통찰력에서 나온것이었다. 


또한 전쟁중임에도 류성룡은 끊임 없이 군사적 개혁을 실시하여 촌락단위의 지방군(지금의 민방위 훈련군) 속오군을 창설케하고 그의 임짐왜란의 난민 유민 정책인 둔전론과 연계시켜 한쪽은 훈련을 한쪽은 둔전을 일구게 하여 군대와 농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군대를 조직하게 하였다. 




 

징비록


|임진왜란 후의 류성룡 


임진왜란 내내 조정의 안전과 백성들을 위해 전란극복에 힘쓰던 류성룡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에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생뚱 맞게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나라를 치러 온다는 소리를 명나라 조정에 말했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류성룡을 보내려 했으나, 류성룡이 나이든 노모가 있다는 말로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를 꼬투리 잡은 북인 정인홍의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되어 안동으로 돌아온다. 이후 1600년 조정에서는 다시 류성룡을 불렀으나 류성룡은 이를 거부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오직 저술에만 힘쓴다.



그리고 3년 동안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의 참혹성과 앞으로 일어날 조선의 위기를 막기 위한 임진왜란의 모든 것을 담은 징비록을 편찬하니 이것은 지금까지도 전해지며 많은 학문 연구와 교훈을 얻는데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후 고향에서 청렴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1607년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실제로 유성룡이 죽은 뒤 제기 하나가 없어서 빌려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청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동에 있는 류성룡 묘 


|류성룡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


1.바둑에 특히 능했다고 하는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신청하고 이에 우성룡은 양산을 받치고 양산에 구멍을 뚫어 들어오는 빛으로 훈수를 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2.이순신 장군과도 역시 친밀했던 벗의 관계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서로 전란중에도 서신 교환을 많이 했으며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를 보내주기도 하는 등 잘 알려진대로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3. 류성룡이 앞으로 다시는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안 일어나게끔 써 놓은 징비록이 일본에서 더 인기를 끌어 일본인들이 유성룡을 두고 전시의 명재상이라고 칭할 정도라고 한다. 


4. 정치인 유시민은 류종하, 류우익 등이 류성룡의 후손이라고 하니 대대로 정치 집안인 듯 하다.


류성룡.. 조선의 대표적인 명재상...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에 있어 무능한 조정을 대신해 자신의 모든 재능을 정책에 쏟아부었던 인물.. 그가 조선 사회에 한 것에 비해 많은 것이 묻혀 있긴 하지만 그는 분명 임진왜란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조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정책을 세우고, 적재적소의 인재 기용은 물론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모든 것을 알았던 만능 멀티플레이어였다. 전쟁속 명 재상 류성룡. 그가 꼭 이번 KBS드라마 징비록을 통해 묻혀 있던 모든 것이 드러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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