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인가 폭군인가 엇갈리는 평가 광해군성군인가 폭군인가 엇갈리는 평가 광해군

Posted at 2014. 9. 1. 23:34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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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인가 폭군인가 엇갈리는 평가 광해군 


조선 왕조에서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만 반정으로 인해 쫒겨난 두 왕이 있다.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군과 지금도 평가가 엇갈리는 왕 광해군 이다.  연산군에 대해서는 역사뿐 아니라 지금까지 폭군이라는 진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광해군만은 그렇지 않다. 광해군 그는 과연 누구일까?





선조는 왕위 내내 자신은 적자가 아닌 방계승통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었고 

광해군 역시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방계였다.

 


|광해군이 세자에 오르기까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첫 번째 후궁인 공빈 김씨에게 태어난 광해군은 어릴적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그의 형 임해군이 알아주는 성격파탄자였던지라 주변의 신망을 받고 자란 왕자였다. 


또한 선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중전 의인왕후 박씨가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자 광해군은 세자로서 그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선조는 적자 왕자가 없다고 해도 자신의 둘째 후궁의 둘째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이 장성 할 때까지도 그를 세자의 자리에 올려 놓지 않는다.





천만을 돌파한 영화 <광해> 

 


|광해군 세자에 오르다


이러한 이유들로 세자 책봉이 선조가 나이 40이 넘어서도 결정되지 않자 당시 신하들의 대표 였던 정철과 조정 대신들은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권했다가 선조가 아끼는 신성군의 어머니 인빈김씨와 그의 오라비 김공량의 꾐에 빠져 파직당하고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세자 책봉의 한바탕 힘싸움이 지나고 바로 얼마 뒤, 조선의 역사를 바꿔 놓는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파죽지세로 밀려 오는 왜군 앞에 한양에 있던 선조와 중신들은 제 살길을 찾아 평양으로 피난길을 떠나고 이때 조정에서 전란중에는 만약을 대비해서 세자가  꼭 필요하다고 선조에게 말하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자신 대신 전쟁에서 싸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자신의 아들을 전쟁의 최전선에 나가 싸우라는 선조의 비겁함이 보인다) 


전란중에 신하도 태반이 없고 비참한 상황에서 세자 즉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불의 여신 정이에서 이상윤이 맡은 역할 <광해> 

 


|광해군 임진왜란에서 성군의 모습을 보여주다

 

광해군은 세자가 됬다는 축하보다 먼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의 불구덩이에 뛰어 들어간다.

광해군은 함경도, 강원도, 전라도를 두루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군량미를 확보 했으며 병사들을 모으는 등 전란 수습에 최선을 다했고 멀리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 대신 조정을 둘로 나눈 분조 형태로 국사의 일부를 맡아 행했다.


광해군의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선조는 처음에는 자신을 대신해 싸우는 광해군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는 등의 모습을 보였지만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명나라 구원군이 넘어오면서 살만하자 크게 민심을 얻은 광해군을 향한 끊임 없는 질투를 갖게 된다. (선조는 정말 아버지로서도 임금으로서도 최악의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조는 자신의 아들 광해군에게 쌓인 질투를 풀기 위해 그 전쟁 와중에도 임금을 광해에게 물려주겠다는 전위소동을 벌이면서 전쟁에 여념 없는 광해군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준다.



 

왕의여자


SBS 드라마 왕의 여자 선조와 인목왕후



|세자 광해군의 위기


마침내 길고 긴 7년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와 조정에게 남은 것은 불타버린 궁과 폐허가 된 한양,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이라는 민심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전란 곳곳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다녔기 때문에 백성들은 광해군을 특히나 좋아했고 질투심 많은 선조는 광해군의 이러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600년 자신의 부인인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난 후 2년뒤 선조는 51살 되던해에 김제남의 19살짜리 딸을 새로운 왕비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아들인 광해군보다 어린 중전을 왕비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더욱더 큰 문제가 일어났는데 바로 국혼 4년 후 1606년 인목왕후는 왕자를 낳았고 마침내 자신의 적자를 보게 된 선조의 마음이 광해군을 완벽하게 떠난 것이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적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에게 세자 임명을 꺼렸고 선조는 이를 이용해 옳다구나 광해군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선조는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을 꼭 세자에 올리고 싶었던 것이다.



 


MBC 드라마 구암 허준에서의 광해군 인교진



|광해군 왕위에 오르다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광해군이 점차 위기에 몰릴 무렵 영의정 유영경 등이 앞장서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갑자기 선조가 병세가 위중하여 병상에 눕게 되자 왕위는 다시 광해군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선조는 1년동안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자신의 병이 위독한 것을 직감하고 아직 어린 영창 대신 광해군에게 전위와 대리청정을 시키는 교서를 내린다. 그러나 유영경 등 대신들은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버티기 시작했는데 이러던 와중에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 교서를 내리는 것을 허락하면서 광해군이 뒤를 이을 왕으로 낙점 받게 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선조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유영경과 소북파는 이때까지도 목숨을 걸고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했지만 결국 집념의 광해군이 3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불의 여신 정이에서 임해군 역을 맡은 이광수


|광해군 선정을 베풀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반대했던 유영경과 소북파를 제거 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파뿐 아니라 서인과 남인도 고루 기용하며 정치에 이용한다. 또한 전란의 빠른 극복을 위한 대동법의 실시와 군적의 정비 궁궐과 종묘의 재건, 사고의 재정비, 서적의 출간 등 많은 업적을 남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광해군이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 받는 이유는 국제정세를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무너져가는 명나라와 기세등등히 떠오르는 해였던 후금(청)의 정보를 끊임 없이 파악해서 당시 후금 정벌을 위한 명의 원군 요청을 거부하고 전쟁을 피하려 힘쓴다. 그러다 결국 임진왜란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에게 원군을 보내주긴 했으나 장군 강홍립에게 은밀한 명을 내려 청나라와의 전쟁을 피하면서 어느쪽에서도 원한을 사지 않는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다.





영창대군 묘

 


|광해군 폭정을 일으키다


광해군이 가장 비판을 받는 부분은 바로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 누구든지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타겟은 자신의 형인 임해군이었는데 임해군은 자신의 동생 광해군이 자신을 대신에 왕위에 오르자 끊임 없이 말썽을 일으켰고 왕위에 대해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 광해군은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보내고 그곳에서 사사시킨다. 자신의 형을 죽인 뒤 광해군의 다음 타겟은 자신이 왕위 될 때 변수로 작용한 영창대군이었다. 특히 가만히 세월을 보냈다면 상관 없겠지만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이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겠다는 야망을 버리지 못하면서 비극은 다가온다.


이러한 낌새를 눈치챈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김제남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역모에 휘말리면서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심하게 불을 때는 방안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광해군은 또한 여기서 멈추지 않고 무너진 가문의 인목대비마저 폐모시켜버리게 되는데 이 때문에 민심은 물론이고 광해군 정권의 도덕성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또 광해군은 경덕궁, 인경궁 등 새 궁궐을 세우는 과정에서 민생을 어렵게 했고 대북의 이이첨을 일파를 총애해 이를 견제하지 못해 이들의 전횡을 초래하기도 했다.





인조반정


|인조반정 일어나다.


광해군과 대북 일파의 도덕성 부재와 민생 악화는 인조 반정을 불러온다. 1623년 광해군 15년 김류, 이귀, 심기원, 최명길, 최내길 등이 군사 2000여명을 이끌고 능양군을 앞세워 창의문을 부수고 돌격 했으며 창덕궁 안에서는 훈련대장 이흥립이 호응하여 궁궐을 완전 장악한다.


서인으로 강등되어 갇혀 지내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의 성공에 눈물을 흘리며 반정으로 붙잡힌 광해군과 대북파에게 원한을 갚을 수 있었다.  광해군은 아들과 함께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죽었다. 이후 대북파는 대부분 참수되고 200여명에 달하는 신하들이 유배되었다. 광해군과 그 무리들의 비참한 최후였다.


여러분은 이 광해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물론 성군과 폭군이라는 이중적인 잣대로 그를 완벽하게 평가 할 수는 없겠지만 광해군은 지금까지도 항상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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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해는 성군이다. 왕으로 복귀시켜야한다.
  2. 서인 가장 최악의 당파.
  3. 프른
    와우 좋아요ㅋㅋㅋㅋ
  4. 폐모살제는 상황상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반역은 삼족을 멸하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리한 궁궐 건축으로 민생이 피폐해 져쑈ㅡㅂ니까? 부작용만 생겼습니까?
  5. ㅇㅇ
    왕위에 위협이된자를 죽엿다고 폭군? 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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