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정치 옳은 것이었을까? 흥선대원군쇄국정치 옳은 것이었을까? 흥선대원군

Posted at 2014. 10. 6. 23:29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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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정치 옳은 것이었을까?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이하응.. 조선 말기에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영웅..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두가지 의견이 있다. 호시탐탐 노리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조선왕조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조선말기.. 헌종 이후 끊겨버린 이씨왕권의 계승도와 멀리멀리 돌아 

철종이 이어받으면서 왕권 약화에도 한 몫 단단히 했다.



|흥선대원군의 출생과 청년시절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따지고보면 사실 전혀 왕권과는 관계 없는 왕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당시 판을 치던 안동김씨, 풍양조씨 같은 세도정치 집안들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화도에 사는 바보(?) 철종을 찾아 왕위에 세울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때문에 왕족만 된다면 그 누구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세상이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할아버지는 사도세자와 그 후궁인 숙빈임씨의 둘째 아들 은신군으로 그의 아버지 남연군은 원래는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은신군이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다.


이하응은 어릴적부터 그 머리가 총명하여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12살에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죽고 5년후에는 부친상을 당한다. 


흥선대원군의 10대시절만 해도 당시 조선의 상황은 왕권은 땅바닥을 기어가고 있었고 밑에 몇몇 정치가문들이 군림하고 있던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똑똑하거나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왕족이 있으면 반역죄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 쉽상이었다. 때문에 부모마저 없는 흥선대원군에은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릴적부터 깨닫고 성장하게 된다.






그의 얼굴은 초상화를 비롯하여 사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흥선대원군의 파락호 시절 


강화도령 철종이 낳은 아들들이 모두 일찍 죽자 슬슬 사도세가들은 철종 다음의 왕이 누가 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유력한 사람이 두명이 있었는데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또 다른 왕족 이하전이었다. 


먼저 이하전은 성품이 강직하고 직설적이어서 헌종이 죽고 사실 왕위에 오를 인물로 적격이었으나 똑똑한 사람이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에게 피해가 올것을 알기에 안동김씨 세력은 무조건 반대하고 나섰다. 또한 이 일을 제외하고서라도 안동김씨와 사사건건 부딪혔기 때문에 결국 철종 13년 모반죄에 몰려 사사당하고 만다.


반대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총명한 머리로 자신을 감추고 가난을 빌미로 세도가인 김좌근에 집에 찾아가 돈을 꾸거나 자신의 아들의 관직자리를 청탁하는 등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편 건달처럼 생활하며 기생을 희롱하기도 하는 등 파락호 생활을 한다. 때문에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모습을 보고 세도정치 가문들은 자연스럽게 이하응을 우습게 보게 되고 이하응은 세도가의 감시에서 멀어지는 왕족이 된다.





흥선대원군의 사진.. 사진속에서도 그의 집념이 보인다. 


|흥선대원군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다


이하응은 파락호 생활을 하며 사도세가의 눈을 피하는 동시에 철저하게 궁궐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 놓았다. 철종의 죽는 순간을 알기 위해 궁중의 환관과 궁녀는 물론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임명해줄 조대비에게 아들을 양자로 주겠다며 동맹을 형성하고 풍양조씨 세력인 조성하, 조영하와도 가까이 지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안동김씨 김병학과 김병국 집안에 고종의 비로 김병학의 딸을 삼겠다고 밀약을 맺으며 세력을 만드는 치밀함도 보였다. 겉으로는 바보생활을 뒤에서는 대단한 정치 감각을 활용한 세력 다지기에 나선것이다.


결국 철종이 예상대로 후사 없이 서른세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왕실의 어른인 조대비는 신하들을 불러놓고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다음 왕으로 지목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비운의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었다. 물론 이하응 역시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으로 불리며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으로 불리게 된다.





드라마 닥터진의 흥선대원군을 맡은 이범수

 


|흥선대원군 세도정치를 척결하고 왕권을 강화하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앉자마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가장 먼저 그토록 싫어했던 세도정치 가문들을 척결하기 위해 그들 세력의 근거가 되는 비변사를 무력화 시키고 김씨 세력을 몰아내며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기 시작한다. 세도정치에 힘 입어 백성들을 수탈하던 서원들을 철폐하게 하고 백성들을 위한 개혁들을 단행하면서 자신과 아들을 향한

탄탄대로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점점 조선을 향해 다가오는 서양세력과 일본등에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쇄국정치를 선언하고 프랑스 선교사 처형을 계기로 침략한 프랑스 함대를 힘들게 강화도에서 격퇴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침략한 미국 함대 마저 격퇴하며 이곳 저곳 척화비를 세우고

개방의 문을 굳게 닫았다.(물론 이에 대해서는 후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드라마 명성왕후에서 흥선대원군역의 유동근..  


|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를 위한 무리한 정책. 그리고 명성왕후를 책봉하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척결하고 기타 여러 정책들을 돌보면서 선정을 베푸는 듯 했지만 사실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왕권강화에만 집착하여 당시 조선의 재정상태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경복궁 중건은 물론 이에 드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원납전을 무분별하게 주조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원성으로 돌려 놓는 실책을 범하게 된다. 

당시 시대의 흐름을 어쩌면 제대로 읽지 못했기에 왕권강화만으로 모든 조선의 문제들과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분명한 착오였다.  

또한 흥선대원군 자신의 정치 인생을 몰락시킬 숙적이 나타나니 바로 며느리 명성왕후다. 사실 명성왕후는 흥선대원군 자신이 직접 간택한 왕비로써 세도정치의 기반이 되었던 외척의 난립을 막기 위해 고종의 베필로 명성왕후를 지목 했던 것이었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수완과 야망을 막지 못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 역을 맡은 최명길


|흥선대원군 실각하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대신 정치를 섭정하며 자신의 뜻대로 나라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종이 장성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했던 인사정책 등이 연이은 실패로 돌아가자 이곳저곳서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고 자신의 며느리인 명성왕후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으며 조대비 역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적대적인 세력들은 보수 유학자 최익현의 상소를 앞세워 기습적인 정치적 공격을 단행 명분이 없어진 흥선대원군을 몰아낸다.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한동안 운현궁안에만 은둔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머물던 운현궁  


|흥선대원군과 임오군란.. 그리고 정치적 말년

흥선대원군이 정치에서 물러나자 명성왕후만 믿고 민씨 일파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나라를 어지럽히기 시작했고 또 일본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개방정책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화정책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의 극심한 반발을 가져왔고 여기에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우대하고 기존에 있던 구식 군인들을 무시하기 시작하자 금새 활활 타올라 구식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임오군란이다.

구식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민씨일파를 주살하기 시작했으며 명성왕후를 찾았으나 명성왕후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구식군인들은 제일 먼저 흥선대원군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실각한지 무려 10년만에 다시 재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은 얼마뒤 들어온 청나라 군대에게 제지를 당했고 심지어 납치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청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이때도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끌려가는데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이를 막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얼마나 부자사이간의 갈등이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흥선대원군의 묘 


이러한 갈등을 통해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 고종에게 크나큰 실망감을 갖게 되어 적대시 하기 시작했고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노력했을 정도로 이후 부자의 갈등은 극에 다다른다.

흥선대원군은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을 찾고자 여러 세력들과 손을 잡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청나라에서 다시 조선을 돌아왔음에도 민씨일가에 의해 운현궁에 갇힌 채 아픈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후 갑오개혁이 일어나며 일본의 도움을 받아 또 다시 정계에 복귀하나 싶었지만 이 마저도 실패하며 좌절하게 되고 자신의 숙적인 명성왕후가 왜인들의 손에 죽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다시 정권을 잡나 했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는 아관파천을 진행하면서 흥선대원군 자신도 경기도 양주로 가 은거하다가 3년 후 숨을 거둔다.

흥선대원군 그는 무너져가는 조선왕조를 잡으려 했던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조선의 근대화와 발전을 늦추었다는 비판을 많이 받기는 하나 그를 빼놓고는 조선 말기를 말할수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와 끊임 없는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모든 권력을 잃었으나 조선에 대한 부국 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 죽을때까지 권력을 갈구 했던 인물중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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