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는 무슨 뜻? 고려 성종 최승로의 고려를 향한 충정 시무28조시무는 무슨 뜻? 고려 성종 최승로의 고려를 향한 충정 시무28조

Posted at 2020. 8. 1. 17:48 | Posted in 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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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는 무슨 뜻? 고려 성종 최승로의 고려를 향한 충정 시무28조 

충정으로 반드시 지켜주었으면 하는 항목을 제안하는 말로 시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대표적으로 가수 비에게 팬들이 시무라는 말을 붙여 반드시 하지말아야 할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행 아닌 유행이 되어버린 어쩌면 어려운 뜻이라 생각될 수도 있는 '시무' 고려시대의 유학자 최승로가 고려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28조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시무 28조는 어떤 내용일까?

 

최승로

|최승로는 누구일까?

 

최승로는 927년 경주출생으로 그의 아버지 최은함은 신라의 6두품 출신이다. 935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이후, 고려 조정에서 일하게 된다. 최승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12세때 태조 왕건이 최승로를 불러 논어를 읽히고 칭찬을 했다고 전하니 그가 얼마나 총명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태조 왕건은 어린 최승로를 원봉성의 학생으로 둘 것을 명령하였고 말안장과 식량까지 포상으로 내리니 그야말로 인재중 인재였다.

 

이후 청년시기가 되던 광종 집권대에는 학문과 관련된 일을 하며 정치에는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는 광종이 통일 이후 귀화인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하면서 중앙의 요직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하고 불교가 아닌 유교사회 건설에 대해 포부를 밝히면서 정5품 이상의 시무와 관련한 상소를 올릴 것을 명한다. 

 

이때 종2품의 최승로가 장문의 시무책을 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성종에게 채택되어 유교사회건설의 닻을 올리는 시발점이 된다. 상소문을 올리던 982년 최승로의 나이는 56세로 당시에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시무28조

|시무28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최승로의 시무28조는 크게 세 부분이다. 첫째는 상소를 올리게 된 배경 둘째는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고려5대조에 대한 평가, 셋째는 왕을 위한 28조에 대한 시무책이다.

 

먼저 상소문을 쓰게 된 배경은 당나라 사관 오긍이 '정관정요'를 편찬하여 현종에게 올린 일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상소문 역시 그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당시 오긍의 정관정요는 당태종의 정치형태를 본받을 것을 강조했는데 최승로는 이를 넘어서 고려시대 성종 위의 5명의 왕에게서 배울점을 모두 평하게 된다. 

 

둘째 고려5대조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1. 태조에게서는 넖은 도량과 포용력

2. 혜종에게서는 왕족간의 우애를 지키려는 마음

3. 정종에게서는 사직을 보존하려는 의지

4. 광종에게서는 공평무사함

5. 경종에게서는 현명한 판단을 배우라고 하였으며 반대로 각 왕들의 실수도 열거하며 그 원인과 결과도 명명백백 구성하였다. 

 

비 팬의 시무 20조

그렇다면 최승로의 시무28조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시무28조는 현재 22조밖에 내용을 전하지 않고 있지만 그 주요 내용은 크게 6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1조는 서북 변경의 수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간언하였고

 

2조, 6조, 8조, 10조, 13조, 16조, 20조에서는 불교와 승려에 대한 예우를 삼가고 연등회, 팔관회 등의 행사를 철폐하는 한편 유교사상을 통해 왕도정치를 실현할 것을 역설 하고 있다. 

 

3, 14, 15, 19, 12조에서는 광종대에 강화된 왕 직할군과 궁중노비를 줄이고 군주가 신하를 예우하는 자세를 보이며, 공신들의 자손들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국가의 번잡한 제사를 줄이고 군주가 유교적 몸가짐을 가질 것을 왕의 올바른 행위로 말하고 있다. 

 

4, 5, 18조에서는 왕의 사소한 행위를 금지하고 상벌과 권성징악을 통한 정치를 펴며 중국에 보내는 사신을 줄이고 금,은, 동, 철을 사용한 불상제작과 불경필사의 금지를 주장하는 등 경제외교적 측면을 강조한다. 

 

7, 12조에서는 주요 지역에 외관을 파견하고 섬 주민들에 대한 공역의 균등화 등 지방정책에 대한 언급도 있다.

 

9, 11,17, 22조에서는 의복제도와 사회신분제도를 유지할 것과 고려 고유의 풍속을 준수할 것을 언급하며 사회기강에 대한 문제를 집중 거론하고 있다. 

 

이처럼 최승로의 시무28조에는 정치, 경제, 국방, 문화, 사회, 행정까지 모든 분야를 담고 있으며 성종은 이것을 즉각 수용하여 고려시대의 개혁정책 드라이브를 걸게 된다. 

 

|불교에서 유학으로를 강조한 최승로의 시무28조

 

고려사회는 불교로 세워진 나라였고 광종대에 처음으로 과거제가 도입되긴 했지만 귀족들은 유학에 그리 관심이 없던 상황이었다. 최승로는 이러한 상황이 교육을 받지 못함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했고 중앙집권화를 꿈꾸는 성종의 생각과 맞아떨어지며 고려시대의 변혁이 시작된다. 성종과 최승로는 국자감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 학교를 설치하는 한편 전국 12목에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유학돌풍을 일으킨다.

 

개혁과정에서 최승로는 문하시중 자리에 올랐고, 회갑을 넘겼지만 성종의 성화에 못이겨 개혁의 선봉에 최승로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최승로는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에 성종은 몹시 슬퍼하며 벼슬과 재물을 부족함 없이 내렸다. 

 

불교가 아닌 유학으로 나라를 바꾸는 것이 최승로의 목표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시무28조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달되어 그 뜻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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