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연산군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바른말을 하다! 조선의 강직한 내시 김처선

윤여시 2021. 3. 1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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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바른말을 하다! 조선의 강직한 내시 김처선

우리에게 흔히 역사속의 내시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연약하고 다소 희화화 되서 표현하지만 사실 역사속에서 내시는 지금의 청와대 비서와 버금가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수많은 내시들과 환관들 속에서 그 강직함과 충정의 소리로 죽음을 맞은 충신이 있었다. 그가 바로 내시 김처선이다. 

 

드라마 인수대비의 김처선

|김처선의 출생과 젊은시절

 

김처선이 죽은 때는 연산군때지만, 그가 내시가 된 것은 무려 세종때였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조선의 7왕을 섬긴 인물이었던 것이다. 젊은 김처선은 상당히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다. 문종 때 경상도로 유배되었다가 1453년 귀양이 풀려 직첩이 되돌려졌지만 1455년에는 금성대군의 옥사에 관련되어 유배되어 관노로 사는 등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1457년 세조 3년에 다시 복직되었으나 세조의 시중을 잘 들지 않는 직무유기로 곤장을 막거나 궁궐에서 술을 먹고 실수를 하는 등 당시로는 분명 파격적인 내시의 삶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확실한 것은 김처선의 젊은 시절을 살펴 볼때그렇게 내시로서 최선을 다했다고는 하지 못할만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왕과 나 김처선

|김처선, 성종대에 올라와 인정받다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대에 이르러 신임을 받으며 김처선은 자헌대부를 제수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때, 내시가 너무 높은 관직을 제수 받았다며 말들도 있었다고 하나 여튼 김처선은 성종의 비서실장으로 신하들을 혼내거나 하사품으로 말을 받는 등 그 능력을 인정 받는다. 

이후 성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김처선은 성종의 능을 돌보는 내시가 되었으며 성종의 3년 상이 끝나고서야 궁으로 다시 복귀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희대의 폭군 연산군 때에 김처선은 곤장 1백대를 맞는 형벌에 처해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직언을 올리며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처선 최후를 맞다

 

1505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쫒겨나기 전 해, 그러니까 그 포악함이 가장 극에 달했던 순간이었다. 이때 김처선은 도저히 연산군의 음란함을 참을 수 없던지라 다시 한 번 간언을 할 준비를 끝낸다. 그리고는 가족들에게 말한다. 

"오늘 궁에 들어가면 살아서 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집을 나선다. 

이때도 연산군은 궁녀들과 함께 음란한 놀이인 처용희를 즐기며 방탕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이에 김처선이 큰소리로 연산군에게 말한다.

"늙은 저가 일곱 왕을 섬기며 글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전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부디 이성을 찾아 굶주린 백성을 돌보소서" 

이에 연산군이 노해서 김처선에게 화를 내면서 화살을 쏴 김처선의 옆구리를 맞힌다. 그럼에도 김처선은 말한다. 

"늙은 내시가 어찌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그러다 용상에서 내려오실까 두렵습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더욱 노하여 김처선의 다리를 화살로 맞춘다. 그러자 김처선이 끄러졌고 연산군이 소리친다.

"일어나서 걸으란 말이다"

그럼에도 김처선이 간언을 계속하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다리와 혀를 잘라 죽였다. 그리고서는 그 가족들을 모두 참수했으며 김처선의 부모 무덤까지 파헤치게 했다. 여기에 김처선의 처 자와 선 자의 이름을 쓰게 못하기까지 하니 연산군의 분노가 얼마나 엄청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인 <연산군일기>에는 김처선을 죽였다고만 전해져 있고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으며 <연려실기술>에서 담겨 있는 말이다.

 

바로 이듬해 연산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대에 이르러 신하들이 김처선의 충정에 포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중종은 김처선이 술에 취해 한 말이라며 포상하지 않았다. 이후 김처선이 인정 받은 것은 영조 27년대에 이르러 영조가 명을 내려 김처선을 위한 정문을 세우니 그가 죽은지 253년 만에 신분이 복권 된 것이다.


조선의 7명의 왕을 섬기며, 흥청망청 폭군 연산군을 만나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김처선.. 당시 대신들이 연산군의 눈치를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불의를 참지 않았던 그의 용기야말로 우리의 공직 사회에서 본을 받을 만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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