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15. 5. 9.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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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의 공신 김류 그는 누구인가?


최근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시대를 중점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드라마가 연이어 만들어지면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과 간신 그리고 신하들이 그 주목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운 반정의 공신으로 드라마<화정>에 처음 등장한 김류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약간 심술 궂게 보이는 이 사람이 바로 김류

출처: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김류의 출생과 성장


김류의 아버지는 김여물로 임진왜란 당시 그 유명한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함께 자결한 인물로 그가 죽은 후에 영의정에 추존되었던 인물이다. (김여물은 신립의 충주에서 싸우자는 의견을 반대했던 장군으로 문경세재의 길목에서 왜군을 막아야 한다는 청을 올렸던 인물로 유명하다.)


여튼 그의 아버지가 적과 끝까지 싸우다 죽었던 호국공신이었으니 김류 자신도 자연스럽게 참봉으로 제수를 받았으나 1596년에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정식으로 벼슬에 올랐다. 임진왜란 말미 나름대로 공을 세운 그였지만 1598년 그 아버지 김여물이 전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상소가 올라오면서 탄핵 되기도 했다. 


드라마 <화정>에서 김류역을 맡은 박준규


|김류의 슬픈 인생, 인조반정 직전까지


파면된지 3년후 모함이 풀리며 다시 복직된 김류는 바로 다음해에 북인 정인홍이 사헌부를 담당하며 파직되었고 다시 벼슬자리에 올라오는 듯 했으나 별볼일 없이 지방직을 전전했다. 


이후에도 김류는 나름 광해군 정권에서 명나라도 다녀오며 뭐좀해볼려고 하다가 끊임 없이 북인 세력에 의해 무시 당하면서 탄핵 받고 쫒겨나기 일쑤였다. 즉 광해군 시절 서인이었던 그는 전혀 별볼일 없는 이름 없는 벼슬아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드라마 <궁중잔혹사>에서 김류


|김류의 인생 역전 인조반정


광해군과 북인정권에서 별볼일 없게 지내던 김류는 인목대비의 폐비에 반대하며 북인 정권에 제대로 밉상이 되었고 이에 김류는 자신의 아버지 상관이었던 신립의 아들 신경진과 반정에 대한 의견을 처음으로 나누게 된다.


이후 같은 처지인 이귀와 함께 본격적인 반정에 대한 계획을 세워갔다. 사실 원래는 1620년 반정을 일으키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3년 뒤인 1623년 이귀, 신경진, 이괄 등과 함께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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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이 성공을 하면서 김류는 일약 개국공신과 같은 조정의 실세가 되었다. 김류는 반정이후 정국안정에 나서서 일을 처리 했으며 이귀 등과 함께 1등 공신에 올랐다. 하지만 김류와 함께 반정을 일으킨 장본인인 이괄을 2등 공신에 책봉하면서 후에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는데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여하튼 그는 인조반정을 계기로 병조판서에 오르며 당파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나름의 노력을 다했다. 


김류 글씨

출처: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김류가 사는 법


인조반정 이듬해 자신의 공을 알아주지 않는 조정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난을 일으켰다. 난이 일어나자 김류는 인조와 함께 공주까지 피난을 떠나기 직전 만약을 대비해 북인들과 이괄의 식구 등을 모두 처형하는 잔인함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 당시 김류와 겁 많은 인조로써는 좋은 대비책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 이괄의 난이 진압되어 김류의 벼슬은 쭉쭉 올라가면서 마음 편히 탄탄대로를 달리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이윽고 인조 정권에게 돌아온 것은 청나라의 압박이었다. 광해군 정권에 비해 외교적으로 무능했던 인조와 김류를 포함한 서인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파국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고 마침내 인조가 삼전도에서 머리를 세번 땅에 박는 치욕을 겪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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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병자호란때 조정은 여차하면 강화도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 강화도의 방어 책임자로 있었다. 그런데 김경징은 강화도에는 절대 청나라 군대가 넘어오지 못한다며 호언장담하며 방비를 게을리 하다가 청나라에게 강화도를 빼앗겨 버렸고 이 때문에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인조도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을 하게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때 김류 가문의 김여물의 후실 부인, 김류 부인, 김경징 부인, 손자 부인 모두가 강화도가 점령 당하는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자결을 하니 이것도 김류에게는 큰 비극이었다.


이후 김경징 역시 이 일로 인해 탄핵을 받아 사사를 당하게 된다. 이때도 인조는 김류의 아들이라며 지켜주려하다가 조정의 탄핵이 너무 심해 결국 사사를 명하게 되었으니 인조의 김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산시 와동에 위치한 김류 묘

출처: 향토자원


|김류의 죽음


김류 역시 김경징이 사사당할 때 탄핵 받아 파직 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었고 1644년 영의정에 오르는 모습을 보였는데 여기서도 인조의 김류 사랑을 엿볼 수 있다.이후 인조의 곁에서 뜻을 펴다가 당시 조정을 양분하고 있던 최명길 세력과 김자점 중심 세력에서 터져나온 심기원 역모사건을 처리하며 다시 한 번 그 공을 인정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김류의 행동은 본인에게는 다시 한 번 영의정에 책봉되는 영광을 가져오긴 했지만 간신 김자점의 권력 독점을 가져오게 되는 악영향도 끼치게 되었다. 이후 김류는 봉림대군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왕의 옆에서 완만히 처신하며 1648년 77세의 나이로 나름 편안한 죽음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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