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재위 1년 만에 단명한 왕, 조선 예종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3. 31. 21:07
반응형

재위 1년 만에 단명한 왕, 조선 예종 그는 누구인가?

계유정난 이후 왕위에 오른 세조, 그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이었던 예종이 왕위에 오른다. 예종은 조선 역사에서 조선 12대 왕 인종 다음으로 가장 빨리 승하한 왕이다. 언뜻 보기에는 뭐 해보려고 하다 죽은 왕일 것 같은데, 나름 그 재위기간 15개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예종 그는 과연 누구인가?

 

예종 가계도

|예종의 출생 그리고 왕위에 오르다

 

조선 8대왕 예종은 세조의 차남으로 사실상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그의 형 의경세자가 예종(해양대군)보다 12살이나 더 많았기도 했고, 예의가 바르고 글읽기를 즐겨해 왕위를 이어 받는 것에 있어 전혀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경세자는 몸이 병약하여 1457년 20살에 횡사를 하였다. 

 

예종은 이후 한명회의 딸 1460년 11살의 나이로 한명회의 딸을 세자빈(장순왕후)로 맞이하였으나 1년후에 세자빈 한씨가 요절하였고, 1463년 간택후궁인 한백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한다. 

 

이렇게 해서 예종(해양대군)은 세자가 되었고, 세조가 죽기 전, 선위 함으로써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예종, 뜻밖의 왕권강화

 

예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권강화를 통한 공신들의 세력 약화에 집중한다. 예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의 아버지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일으킨 구 공신과 세조 말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 공신들이 있었다. 예종은 이 공신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먼저 구 공신들이 세조의 묘호를 신종으로 올렸는데 예종은 세조라는 묘호를 고집했으며, 예종이 가장 욕먹는 이유중의 하나인 충성스러운 장군이자 신공신을 대표하는 남이장군을 죽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2015.02.20 - [국사/조선] - 너무도 억울한 죽음 남이 장군

 

예종은 세조의 신임을 받아 어린 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오른 남이를 위험하게 생각했고 즉위하자마자 남이를 강등시켰으며, 이후 간신 유자광이 남이가 지은 시 '미평국'(나라를 편한하게 못하면)을 '미득국'(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고 조작하여 역모를 꾀했다고 모함하면서 남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남이 사건 이후, 예종은 왜와의 사무역을 금지시켰고, 또 세조때부터 편찬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였으나 반포하지 못한채 승하한다.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등장하는 예종 

|예종의 승하

 

예종이 왕위에 오른지 13개월이 되던 1469년 그는 발에 난 병에 세균이 들어가 봉와직염 형태로 접어들며 패혈증으로 진행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예종이 언급했던 발의 질환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병이었고, 그의 시체가 2일만에 부패된 것으로 보아패혈증의 형태이기도 하다. 

사실 발의 병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예종의 죽음은 어쩌면 너무나 예상 못했던 것이기에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어머니 정희왕후는 "예종이 항상 아침 인사를 드렸는데 병이 중하면 어찌 그랬겠는가"라고 말했으며 신하들 역시 예상한자가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복상사나 독살설도 돌긴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 

여튼 예종이 갑작스럽게 죽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었던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 9대왕 성종이다. 사실 왕위 계승에 있어 예종의 원자는 너무 어려서 제외되었고 의경세자의 장자인 월산군은 병약했으며 당시 자을산군의 장인이었던 한명회가 자을산군을 적극 밀면서 진행된 결과였다.

 


사실 조선 예종은 그 아버지 세조와 성군 성종 그리고 조선을 대표하는 폭군 연산군의 사이에 잠깐 지나간 왕으로 보이며, 남이 장군의 억울한 죽음 등에 엮여 있어 인상 깊거나 좋은 왕으로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그가 왕위에 오른지 바로 죽었기에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 애매한 부분도 있으나 나름 강력한 집권을 도모하려 했던 그의 발자취를 살펴볼 순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