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이 몰려온다! 임진왜란의 시작과 한이 서린 곳 부산 동래성 전투적군이 몰려온다! 임진왜란의 시작과 한이 서린 곳 부산 동래성 전투

Posted at 2019. 8. 21. 11:18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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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이 몰려온다! 임진왜란의 시작과 한이 서린 곳 부산 동래성 전투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기 이전에 철천지 원수에 가깝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조선초 왜놈들의 끊임없는 약탈 부터 조선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은 임진왜란, 그리고 조선의 끝을 알린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은 항상 우리나라를 대륙으로 진출하는 통로로 생각해왔고 이를 통해 그들의 꿈을 이루려 노력했다.  

그중에서도 정명가도(명나라를 정벌하는데 길을 내줘라)라는 말도 안되는 명분으로 우리 국토와 조선 백성을 잔혹하게 짓밟았던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성이 그대로 드러난 전쟁이리라... 임진왜란의 처음 공격 지점이었던 부산은 왜놈들을 막고자 필사적으로 항쟁했던 곳 중 하나인데.... 그중에서도 동래성은 그 필사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부산진 전투가 임진왜란의 가장 첫번째 전투이며 그 다음이 동래성 전투이다. 

|동래성 전투 그 시작

그중에서도 동래성은 그 필사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전토를 통일하고 조선 정벌의 명분으로 정명가도를 주장하며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다. 왜군의 조선 침공 제 1진인 1만 8000여명의 병력을 이끈 고니시유키나가는 1592년 4월 13일 오후 4시 당시 정발이 수비하고 있는 부산진성을 침략하는데 이때 우리 군은 고작 1,000명이었다. 

왜군은 조총과 우세한 군세를 앞세워 부산진성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부산의 내륙지방인 동래성으로 북상을 시작했다. 1592년 4월 15일 순식간에 동래성에 도착한 왜군은 실로 그기세가 대단했다. 

동래성을 지키고 있던 장군 송상현은 3,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있었으며 임진왜란이 있기 얼마전부터 부산진 왜관의 일본인들이 떠나는 등 이상징후가 보이자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래성 순절도

|동래성 전투 그 전개

왜군이 동래성에 다다르자 송상현은 예상했다는 듯이 방어체계를 갖추었다. 경상좌도 병사 이각이 울산에서 돕기위해 왔으나 부산진성이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협공한다는 핑계로 도망을 갔고 경상감사 김수 역시 동래성을 돕기 위해 왔으나 왜군의 군세를 직접 보고는 도망을 쳤는데 송상현은 이를 의식하지 않고 최후 결전의 준비를 한다.  

고니시유키나가 역시 조선군이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동래성 앞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라는 나무 현판을 동래성 송상현에게 보였는데 이에 송상현은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답을 했다. 이를 본 고니시유키나가는 공격명령을 내려 동래성을 침략한다.

왜군은 압도적인 기세로 동래성을 포위해 들어갔고 동래성의 약점이었던 동쪽의 성벽이 무너지면서 성안으로 진입했다. 이때가 정말 처절한 전투였는데 조선의 병사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농기구를 들고 왜군에 맞서 싸운 것이다. 여기에 아녀자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집어던지며 왜군과 싸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잘훈련되고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왜군 중 평조익이라는 사람은 이전에 송상현에게 은혜를 입은 바 피신할 곳을 알려주었지만 송상현은 이를 거절하고 부모님께 다음과 같은 시를 올린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列鎭高枕 여러 진들은 단잠을 자고 있네
君臣義重 군신간의 의는 중하고 
父子恩輕 부모님의 은혜는 가볍도다 

이후 송상현은 끝까지 왜군과 싸우다 왜군의 칼에 찔려 전사했으며 조영규 또한 전사하였다. 송상현의 가족 중 소실 금섬은 왜군에게 사로잡혀 욕을 하다가 살해당했고 또다른 소실 이씨는 일본에 끌려갔으나 절개를 지키고 죽음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송상현

|동래성 전투 그 결과

동래성 전투에 참전한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동래성 전투의 처절한 사투 이후 전투에 참여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의병장 휘하로 들어가거나 임진왜란 내내 끝까지 왜군과 싸우며 공을 올린다. 이는 공신으로 지정된 인물 중 부산 출신의 인물이 66명이나 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동래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며 고향으로 그 시신을 돌려보내긴 했지만 전쟁에서 저항한 무고한 백성과 병사들은 처참하게 죽였다. 또한 포로가 된 동래성 백성들을 동래성 해자 앞에서 죽여 해자에 묻어버렸는데 지난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공사 때 동래성 해자 유적이 발견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사용되었던 무기들과 여자와 아이들의 유골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여자와 아이의 유골에는 철퇴나 창검에 찔린 흔적은 물론 목을 베인 흔적도 있어 당시 참상을 알 수 있는 증거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동래성이 무너지고 난 뒤 왜군은 경상도와 충청도로 진격에 성공하였고 충주에서 탄금대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조선 땅을 짓 밟게 된다. 


왜군의 임진왜란 두번째 전투였던 동래성 전투는 비록 처절하고 안타깝게 패한 전투이긴 했지만 조선의 충절을 드러낸 전투이자 병사와 군민이 끝까지 항전한 전투로서 향후 임진왜란 때 끝까지 왜군에 저항한 의병들의 정신에 큰힘이 되었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에게는 조선의 정신을 보여준 전투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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