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삼국시대

절실한 사랑 이야기! 고구려 역사 속 실존 했던 그 이름 평강공주 온달장군

윤여시 2021. 1. 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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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한 사랑 이야기! 고구려 역사 속 실존 했던 그 이름 평강공주 온달장군

어렸을 적, 위인전보다 우리나라 동화속에서 더 많이 읽어봤을 법한 그 이름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신데렐라 컴플렉스의 남자 버전인 바보온달 컴플렉스를 만들어 낸 그 이름 온달장군, 하지만 단순히 동화나 구전 이야기가 아닌 역사속에서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이름은 제법 등장한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서울 아차산 입구의 평강공주와 온달, 왜 아차산성에 있을까?


|온달 그는 언제 역사에 등장할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온달 열전에 '온달'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온달은 고구려의 제 25대 왕이었던 평원왕 시대의 사람이다. 그 생김새가 못생기고 우스꽝스러우나 마음은 착하였다. 집은 가난하나 효자여서 밥을 빌어 자신의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행색 역시 초라해 사람들이 그를 바보온달이라 했다.

 

삼국사기에서도 전하듯 그는 이미 당시 평양성내에서 바보온달로 소문이 났던 인물로 평원왕까지 소문이난 걸 보면 바보로는 거의 독보적인(?) 인물인 것 같다.  


|온달, 평강공주를 만나다니

 

평원왕에게는 자신의 첫째부인에게서 얻은 딸 평강공주가 있었다. 평강공주는 어렸을 적 너무나도 많이 울었는데 우리가 동화속에서 익히 아는 것처럼, '공주는 너무 잘 울어서, 너한테 아무도 시집을 오지 않겠다. 바보온달이랑 결혼해야겠네'라고 자주 평원왕이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평강공주가 시집갈 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귀족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려 한다. 그런데 갑자기 평강공주가 말하길,  '아버지께서 저에게 온달 왕자에게 시집 보낼 것이라 말했으니 저는 온달왕자에게 갈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평원왕은 처음에는 웃으면서 넘어가다 나중에 평강공주가 진심인 것을 알고 화를 내다가, 아예 평강공주를 내쫒아버린다. 

궁에서 쫒겨난 평강공주는 온달을 만나 청혼을 하였고, 갑작스러운 청혼에 온달은 어안이벙벙했지만 진심을 알고 결혼을 한다.  이후 평강공주는 자신이 궁에서 가져나온 것들을 팔아 집과 땅을 구입하고 말을 키우며 집안 살림을 돌보며 바보온달을 하나하나 가르치고 훌륭한 장수로 만들어낸다.

|온달, 고구려의 장군이자 평원왕의 사위로 인정 받다

 

평강공주 덕분일까 온달은 고구려에서 왕까지 참여하여 매년 봄에 열리는 사냥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평원왕과 신료들을 놀라게 했으나, 이때까지만해도 아직 평원왕이 자신의 사위로 인정하기에는 모자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 중국 후주의 무제가 요동을 침범하자 평원왕은 군사를 이끌고 맞아 싸웠는데, 이때 온달 역시 전투에 참여하여 그야말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 장면을 삼국사기에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 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고구려왕은 맞서싸웠다. 그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적의 목을 베니 고구려 군사들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기뻐하며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의 사위임을 공표하고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서울 아차산성의 위치

|온달의 죽음과 평강공주

 

동화속에서 온달왕자와 평강공주는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살았대요..가 끝이나 사실 그 뒷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590년 장인이었던 평원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자 평강공주의 동생인 영양왕이 왕위에 오른다. 이때 온달은 고구려의 대장군으로서 당시 수나라와 싸울 때, 신라가 쳐들어와 빼앗은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전쟁에 나선다. 

온달은 이때, 신라에게 뺏긴 죽령 이북의 땅(지금의 강원도와 경기도 경계)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전쟁에 나선다.  그러나 온달은 불행하게도 아차산성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이후 고구려군이 온달의 시신을 관에 넣어 장사지내려 하는데,  온달이 잠든 관은 꿈쩍하지 않았다. 해서 평강공주가 그 자리에와서 '이제 편안히 가시옵소서'라고 울며 관을 어루만지자 그제서야 관이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다고 전한다.

 

 

|온달은 외국인? 그의 존재에 대한 여러가지 설

 

자 이제, 동화속에서 빠져나와 실제로 온달의 존재에 대해 알아보자, 물론 우리의 동심대로 바보였던 온달을 오직 사랑으로 한나라 대장군으로 만들어낸 평강공주의 사랑이 전부이길 바라겠으나 그 해석은 분분하다. 

 

1. 온달의 신분 - 하급 귀족, 신흥 세력 

 

후주와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만들어낸 온달, 이때 그가 받은 대형의 벼슬은 사실 높은 벼슬은 아니다. 왕이 참전한 전투에서 한 나라를 구해낸 공적을 올렸음에도 이정도를 받은 것은 그가 하급 귀족 및 몰락 귀족의 부류였지 않을까 추측한다. 

이렇게 신분은 낮았지만 평원왕의 사위로 들어가게 되자 당시 고구려의 주류들이 이를 비꼬아 바보온달과 울보의 결혼이라며 평가 절하했다는 설이 있다. 

 

2. 온달의 신분 - 신흥 평양성계 남방귀족

 

온달은 평양성계를 대표하는 귀족이었을 것이다. 사실 당시 고구려의 국왕을 비롯한 평양성계 귀족은 북방을 호령하던 고구려 초기 국내성계열 귀족에 비해 세력의 힘이 크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왕권이 최고에 다달았던 장수왕대에 평양성으로 옮기며 그 위세가 대단했으나 장수왕 후대에 이르러  북방의 국내성계 귀족은 북방을 잘 다스리며 기세 등등했으나 평양성계 귀족은 백제와 신라에게 영토를 잃어버리며 그  입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상황에서 남방귀족의 위상을 단단하게 다져줄 온달이라는 존재는 분명 위협이 되었고 이것이 바보라는 비하로 이어졌다는 설이다.

 

 

3. 온달의 신분 - 서역계 귀화인(소그드인)

 

온달의 생김새 때문에 온달은 귀화한 서역 출신이라는 소리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란계의 인물로 당시 고구려인과는 다른 생김새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구려가 당시 소그드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는 점은 물론 한국에서 온씨가 희귀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온달의 최후에 대한 분분한 의견'

 

온달의 죽은 곳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아차산성 삼국사기에는 아단성이라 불리는 곳에서 온달이 전사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아차산성이 있는 서울과 온달이 되찾겠다던 죽령이 너무 멀기 때문에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인 단양군의 온달산성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아차산성의 조사에서 발견된 고구려계 유물들과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점령했을 때, 아단성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아차산성이 유력하기는 하다. 또한 고구려가 신라를 쳐들어갈 때 왕의 사위였던 온달이 깊숙한 단양까지 들어가는 위험한 작전에 들어갔겠냐는 부분, 때문에 임진강을 건너 지금의 아차산성을 공략해 들어가는 루트가 가장 유력해보인다. 

단양의 온달산성도 고구려때 지명이 을아단이었다는 점을 비롯해 온달 관련 전승 및 이야기가 이 지역에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온달산성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조선 영조 이후부터이며 온달 전승은 다른 지역에서도 있는 것이라는 점이 그 반대의견이다. 

 

|결론

 

우리의 동심속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평강공주와 온달, 그만큼 그들에 대한 다양한 추측과 관심이 많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것이다. 뭐 사실이 어쨌든 우리 역사속 평강공주와 온달은 분명 당시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했을 것이고, 이후 온달의 나라를 위한 충의 정신과 그 용맹함은 그들의 이야기 속 여기저기에 묻어 지금까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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