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정조와 의빈성씨의 아들, 단명한 왕자 문효세자 그는 누구일까?

윤여시 2021. 9. 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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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의빈성씨의 아들, 단명한 왕자 문효세자 그는 누구일까?

정조와 의빈성씨의 사랑은 조선 역사속에서도 손꼽힐만한 사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의빈성씨는 왕세자인 문효세자까지 출산하며 앞으로의 행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문효세자와 의빈성씨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어찌된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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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 가계도

|축복 속에 태어난 문효세자의 출생

 

1782년 음력 9월 7일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가 태어난다. 이때 새벽임에도 붉은 빛이 침실을 비추며 해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정조의 나이 이때 서른이 다되어갈 무렵이었다. 당시 서른이 다되어갈 무렵에도 후사가 없다는 것은 왕실로서는 큰일이기에 정조는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너무나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정실인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다른 후궁들 역시 임신을 못하고 있었으며 의빈성씨만이 정조의 총애를 받고 두번이나 앞서 임신했지만 유산을 거듭하다 세번째에 겨우 아들을 낳은 것이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고 할 정도로 정조가 기뻐 했다고 전해진다. 문효세자가 태어나자 정조는 당시 궁인이었던 의빈 성씨를 정 3품으로 삼고, 행복에 빠진다. 많은 후궁들 속에서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성씨가 낳은 아들인지라 너무나 행복했던 것이다. 

 

드라마 이산에서 죽음을 맞이한 문효세자

|문효세자 왕세자가 되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나자마자 왕자로 정하고 3살(22개월 만 1세) 때 바로 왕세자로 책봉한다. 아마도 후사가 늦은 정조이기에 신하들이 간언을 했고 정조 역시 이에 빠른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4일이 지나 문효세자의 휘를 정하였고 책봉식을 치뤘다. 이는 <문효세자책례계병>에 두 예식이 그려져 있는데 만으로 1살이었던 문효세자가 이 의례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1784년 8월 인정전에서 정조는 대신들에게 왕세자 책봉을 선포하였고 문효세자는 왕세자의 삶을 살게 된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세자궁 중희당을 지어줄 정도로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문효세자책례계병

|문효세자의 죽음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된지 2년 후 1786년, 그 해는 이미 전국적으로 홍역이 창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효세자 역시 이 홍역에 걸려버리고 말았고 그의 병이 점점 깊어진다. 이에 정조는 종묘 사직에 2번이나 기도제를 올리는 등 문효세자를 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지만 1786년 5월 11일 5세의 나이로 홍역에 걸려 죽고 만다. 

 


이에 정조는 큰 슬픔에 빠졌고 기록에 의하면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라고 문효세자의 묘비에 적을 정도로 마음 아파했다. 이에 정조는 그 묘의 이름을 효창묘로 지었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효창공원이며 지금의 서울 용산구 효창동 일대이다.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 의빈 성씨마저 정조의 품을 떠나는데 정조는 의빈성씨 역시 문효세자 옆에 묻어 준다. 

그리고 문효세자와 의빈성씨가 묻혀 있는 효창묘에 몇번이나 행차(거둥)를 하였는데 이 것 때문에 용산구 효창동 거둥고개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고양시 서삼릉에 위치한 효창원 (일제가 강제로 이장)

이후 고종때에 이르러 효창묘는 효창원으로 승격이 되지만 일제에 의해 1944년 지금의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된다. 더 슬픈 것은 정조가 함께 묻어준 그 묘마저 저 멀리 떨어트려 놓아 이장 했는데, 그야말로 남의 역사를 무참히 짓밟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문효세자의 죽음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꿔놓았다고 평가를 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문효세자가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면 그의 나이인 19세로 이미 섭정을 받지 않고 본인이 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순조가 11살에 보위에 오르며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이에 따라 정조의 실용적인 정책들이 중단되었으며, 안동김씨 등의 세도정치로 이어지며 조선 후기의 암흑기로 빠져든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역사적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5살의 나이에 책을 좋아했고 총명한 세자로 기록되어 있기에 그 마음이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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