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동양

조선을 놓고 벌인 청일전쟁

윤여시 2014. 9. 7. 01:58
반응형

조선을 놓고 벌인 청일전쟁


19세기 말,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조선에 오래전 부터 영향력을 미쳐온 청나라와 근대화에 성공하며 그 어떤 강대국도 부럽지 않았던 떠오르는 일본이 맞붙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나라는 전쟁을 벌였는데... 청일전쟁 그 승리는 누가 했을까?




 

조선의 역사와 함께한 청일전쟁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텐진조약


1884년,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보수파와 명성화후의 민씨 일파가 중심이 된 개화파의 대립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개화적인 성격을 띄었던 민씨 일파의 개화파는 구식군대의 개화파에 대한 반란이었던 임오군란 이후 주춤 거리는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김옥균으로 대표되는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서 하루 빨리 근대화를 실시해서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일념하에 일본 주둔군의 힘을 빌려 우정국 연회 때 민씨 일파를 주살하고 조선의 개혁을 공포하는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1500명의 청나라 군대에 밀려 삼일만에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 일로 인해 조선 침략에 야욕을 제대로 품고 있던 청나라와 일본은 눈치 싸움 끝에 


1. 청일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할 것.

2. 청일 양국은 장차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 사전에 통고할 것.

3. 조선군의 훈련은 청일 양국 이외의 교관으로 위촉할 것.


이라는 텐진조약을 맺게 된다.



 


동학농민운동과 함께 폭탄이 터지다


|동학농민운동과 함께 터진 청일전쟁 (배경)


혼란한 조선의 정세 속에 도탄에 빠진 조선의 백성들에게 다가온 것은 인내천 사상을 중심으로 신분사회에 반대하고 청나라와 일본 등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는 쇄국적인 성격을 띈 '동학'이었다. 이후 이러한 내용을 담은 동학은 삽시간에 조선 백성들에게 퍼지며 그 세력이 급성장 했는데 이미 힘을 잃어버린 조선 정부가 관리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전라도 고부 땅에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격분해 전봉준을 필두로한 동학 봉기군이 일어났고 파죽지세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함락 시키며 전라도 전역을 수중에 넣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태가 이러하자 조선 조정은 자신들의 백성을 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청나라의 위안스카이는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아드리기로 하고 출병을 명령한다. 이에 조선의 정보를 끊임 없이 수집하고 있던 일본은 이 같은 동태를 미리 파악하고 텐진조약에 따라 이틀전에 군대를 출병시켜 청나라보다 빨리 서울에 진입한다.  


그런데 이때 (1894년 6월 11일) 조선 조정과 동학 봉기군 사이에 극적으로 전주 화약이 성립되어 동학 봉기군이 전주에서 철수 하면서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그러자 아무런 명분 없이 자신들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텐진조약에 의거해 출병했던 일본은 이 기회에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 하기 위하여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대와 함께 철수를 해야 함에도 그대로 조선땅에 남아 있는다.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과 함께 터진 청일전쟁 (개전)


1894년 6월 21일 마침내 일본은 어전회의를 열어 청나라와의 전쟁을 확정하고 외상 무쓰를 통하여 청나라에 절교서를 전달한다. 일본의 이같은 태도 변화에 위협을 느낀 청나라 직례총독 이홍장은 숫적으로 질적으로 월등한 해상전력을 보유한 일본에 패배할 것을 예상했지만 이를 막을 도리는 없었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구실을 잡으려 일부러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고 회답 시한을 조선은 7월 22일 청나라에게는 7월 24일로 못받았는데 조선이 기한을 넘어도 답이 없자 일본은 7월 23일 새벽 조선 궁중에 난입하여 장악한다. 이후 일본군은 곧바로 한양의 청나라 공사를 공격하는 동시에 아산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군대를 포위한다.

이때 아산은 청나라 본토에서 해상을 통해 바로 청나라 군대를 보충할 수 있는 요충지였으므로 일본의 함대는 아산항을 포위했고 청나라 함대 역시 아산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함대를 진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나라의 함대는 풍도 앞바다에서 맞붙게 되고 예상대로 일본의 함대가 청나라의 함대를 완벽히 제압하며 풍도해전을 승리로 가져간다.


 


 
|동학농민운동과 함께 터진 청일전쟁 (진행)

풍도해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에 아산에 있던 청나라 군대는 사기가 꺾였으며 해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산에서 우회하여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군대와 합류하겠다는 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아산에서 이동한 청나라 장수 섭지초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는 지금의 천안시 성환읍에서 일본군과 만나게 되고 이 전투에서 대패하며 살아 남은 잔존 군대만이 평양에 있는 청나라 군대에 어렵게 합류하게 된다. 충도해전에 이어 성환전투에서도 승리한 일본군은 그 기세를 타고 평양으로 향한다.

곧이어 청나라 병력 1만 2천여명과 일본 노쓰 중장이 거느리는 병력 1만 7천여명이 맞붙게 되는데 일본군은 자신들의 보급물품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초기부터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붓는다. 그런데도 청나라 진영에서는 성환싸움에서 패배하고 올라온 장군 섭지초와 또 다른 장수 좌보귀의 의견충돌이 계속 되었고 때문에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할 수 없었다.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나라의 전투는 9월 5일부터 16일까지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보급이 부족해 탄환이 점차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해서 일본군은 일단 퇴각을 결정하려 했으나 갑자기 청나라 장수 섭지초가 백기를 걸고 항복하며 도망치기 시작하면서 일본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단행 청나라는 장수 좌보기를 포함한 2000여명, 일본군은 180여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평양에서의 전투 역시 일본의 압승으로 끝난다. 


 


 |동학농민운동과 함께 터진 청일전쟁 (결말)

평양에서의 전투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청나라에서도당  가장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던 북양함대가 증원군을 상륙시키고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 근처 서해에서 다시 맞닥뜨린다. 청나라의 함대가 화력에서는 우위가 있었으나 해전의 노하우 부족과 기동력의 열세로 다시 한 번 처참하게 패배하며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여순항으로 급히 뱃머리를 돌려 도주한다. 일본은 이 기세를 타고 조선의 국경을 넘어 요동반도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여순까지 점령해버린다.

일본군은 여순 함락 이후 여순에 거주하고 있던 시민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고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조선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완전한 포기를 골자로 한 시모노세키조약 을 일본과 맺게 된다.



삼국간섭


 |삼국간섭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조선뿐 아니라 요동반도까지 먹어치운 일본의 팽창에 위기를 느끼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였다. 특히 러시아 역시 조선에 대한 야욕을 품고 있는터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프랑스와 독일 영국에 적극적인 행동을 요청하게 되고 세 나라 모두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이를 받아드려 청일전쟁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묻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자신들이 아무리 강해졌다 하더라도 당시 강대국 3나라의 간섭에 한 발 물러나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니 이것이 바로 삼국간섭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일본의 패배로 보였던 이 삼국간섭 덕분에 일본의 군국주의는 더욱 강해졌고 몇년 후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마저 무찌르는 이변을 연출하며 조선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