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조선 개혁가의 죽음 조광조는 누구?

윤여시 2013. 10. 3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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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혁가의 죽음 조광조는 누구?

폭군 연산군이 중종반정에 의해 쫒겨난 이후 왕위에 오른 중종은 집권초반 역성혁명을 일으켜 자신을 왕위에 앉혀준 공신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중종은 공신의 권력에 대항할 목적으로 연산군 때 그 씨가 마른 사림세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있던 조광조라는 인물이 있었다. 조선왕조의 비운의 개혁가 조광조는 누구일까? 



조광조가 끝까지 자신의 뜻을 펼쳤다면..... 

중종의 집권 초반 중종을 새 왕으로 앉힌 공신들은 수많은 부와 특권을 차지하고 정사를 농단하기 시작한다. 무자비하게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자신의 힘으로 몰아내고 지금의 왕 중종을 세웠으니 뭐가 무서울 것이 있겠는가? 여튼 중종을 세운 공신들은 연산군대에도 큰 벼슬을 가지고 지내던 사람들이었기에 단지 왕을 바꿨다는 이유만으로 그릇된 관료들이 공신이 된다는 것에 중종을 비롯하여 젊은 사림 세력들은 불만을 가졌다. 

그러자 중종은 집권초기에 들어서자마자 연산군 때 폐지당한 사헌부와 사간원을 세웠는데 이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일하는 사람을 언관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역할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들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조사하고 규탄하는 일을 맡은 기관으로서 지금의 감찰부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정문에 위치해 있었다. 터만 남은.. 

그리고 그 사헌부에서도 가장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소명에 최선을 다한 개혁가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조광조이다. 특히 중종은 안그래도 자신을 괴롭히는 공신들을 견제 할 인물을 찾던 중 올바르고 곧은 조광조가 보이자 사헌부에서 제일 높은 대사헌의 벼슬을 주게 된다. 조광조가 관직에 나아간지 40개월도 안됬기 때문에 그 당시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였다고 볼 수있다. 사실 조광조 역시 거듭 대사헌의 자리를 사양했지만 결국 대사헌이 되자마자 공신들을 포함한 그릇된 관료들에 대한 탄핵활동에 나선다. 

조광조는 당시 공신들의 세습제도로 전락되어버린 과거제도부터 개혁을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새로운 정치를 위해서 새로운 인재들을 모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광조는 천거제(과거를 통하지 않고 추천을 통해 관리를 뽑는 제도)를 실시하자고 건의했고 격렬한 공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중종을 움직여 1519년 4월 조선왕조의 첫 천거제 실시를 이끌게 된다. 이때 급제한 인원이 28명으로서 정치일선에 있는 정국공신들을 견제하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조광조는 충실한 성리학자로서 미신인 도교의 중심 소격서터를 폐지하고 끊임 없이 주장했다.


또한 조광조는 조선전기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김굉필의 문하생으로 자랐던 만큼 유교이념이 아니면 다른 모든 것을 배척했는데 당시 궁에서 도교 제사의식을 지내던 소격서를 폐지하자 주장했고 불교와 무속 행사들의 금지를 건의했다. 또한 성리학의 이념이 담긴 향약을 널리퍼지게 하는 한편 손수 한글로 번역하여 아녀자들에게도 알렸다고 한다. 

또한 1519년 10월 조광조는 드디어 공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정치적 공세를 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연산군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들이 연산군의 폭정을 말리지도 않았으면서 중종을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누리는 것에 대한 공세였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공신칭호 박탈이라는 초 강수를 두기 시작했고 결국 76명의 공신들의 칭호와 노비들을 박탈하기에 이른다. 



 조광조 묘.. 조광조도 결국 지는구나... 

 공신에 대한 공격에 당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집권층은 중종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중종 역시 자신이 키워준 조광조와 사림 세력이 하루가 멀다하고 잔소리와 간섭을 하며 너무 급진적인 개혁을 계속해서 간청하자 슬슬 지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리고 이때 한 궁녀가 궁궐의 나뭇잎을 중종에게 바치는데 그 잎에는 벌레가 먹어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그 글씨는 바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주초위왕> 이었다. 이 사건으로 중종은 공신들의 압박, 그리고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에 대한 불만 조광조에 대한 의심이 겹치며 주초위왕의 명분을 통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다.

중종은 맨처음 조광조를 전라남도 화순에 귀양 보냈으나 공신들 및 훈구파의 끝없는 상소로 결국 사약을 내리니 조광조의 나이 그때가 38세였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을때 한성을 향해 3번을 절하고 시 하나를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아들 인종과 명종 그리고 선조때에 이르러 다시 명예를 회복하니 조선 전기의 개혁가 조광조는 올바르게 살다 올바르게 죽고만다. 

후에 조선의 성리학자로 대표되는 퇴계이황이나 율곡이이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니 조광조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이름만큼은 역사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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