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조선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관? 정순왕후 그녀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윤여시 2021. 9. 9.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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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관? 정순왕후 그녀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조선 왕조에서 왕과 가장 많이 나이 차이가 많이나는 왕후는 누구였을까? 바로 영조의 부인이자 정조의 계조모가 되는 정순왕후가 그 주인공이다. 

 

정순왕후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하고 정조 사후 순조의 섭정을 맡아 정조가 시도했던 여러 개혁정책을 중단하는 것도 모자라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불러 일으킨 장본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순왕후 그녀는 과연 역사적인 오명을 쓸만한 인물이었을까? 

 

|15세의 정순왕후 궁으로 들어오다

 

조선의 영조는 조선의 왕 중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그렇기에 1757년, 정실 부인이었던 정성왕후가 죽자 자신의 아버지였던 숙종의 유언에 따라 후궁에서 왕비를 뽑지 않았다. 이후 2년 뒤인 1759년 중전간택으로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을 새왕비로 맞아드리니 이가 바로 정순왕후이다. 사실 정순왕후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정순왕후를 안동김씨로 많이 생각하지만 그녀는 경주김씨이다! 

 

일화에 의하면 영조가 정순왕후를 간택할 때,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다른 규수들은 일반적인 대답을 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 라는 표현을 하며 영조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백성에게 옷을 만들어주는 목화라 말해 영조의 간택을 받았다.

 

여튼 혼인 당시 영조의 나이 66세, 정순왕후의 나이 15세이니 무려 51세의 연상이었을뿐 아니라 의붓아들인 사도세자,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도 10살이 어리고 그 아들 정조와 불과 7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으며 정순왕후의 할아버지 김선경 보다 영조의 나이가 5살이 많았다. 실로 놀라운 혼인이었던 것이다.  

 

드라마 <사도> 정순왕후

|영조 때의 정순왕후 -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을까?

 

많은 매체에서 표현되길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정순왕후가 영조에게 모함을 했다 전하지만 사실 역사속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특히나 사도세자가 죽을 때 정순왕후는 궁에 들어온지 단 3년, 18세 소녀였다. 더군다나 그때는 이미 영조의 눈 밖에 사도세자가 났던지라 굳이 정순왕후가 모함을 할이유도 없었다. 영조 역시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와 상의 했던 일이기에 더더군다나 관련이 없었다. 

 

정순왕후의 가문 역시 사도세자가 죽고 난 뒤 몇년이 지나 그 세력이 나오기 시작했으니 사실상 사도세자의 죽음에 정순왕후가 관여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정조

|정조 때의 정순왕후 - 정순왕후의 경주김씨 가문과 혜경궁 홍씨의 풍산 홍씨의 대립

 

영조 말기가 되면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으로 대표되는 풍산 홍씨 집안은 최고의 권력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에 맞서 정순왕후의 집안인 경주 김씨는 오빠 김귀주를 필두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무렵 영조가 죽고 손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순왕후는 왕실의 어른인 왕대비가 된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조정에 난립하던 홍인한, 정후겸을 탄핵해 사사시켰고 이윽고 풍산홍씨가 정리되자마자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귀양 보내어 정계서 배제 시켰다.

 

순조의 어진 훼손되어 있다. 

|순조의 즉위 - 정순왕후의 섭정과 말년

 

정조가 왕위에 오른지 24년이 되던 1800년 갑작스러운 승하를 하게 되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이에 순조의 나이가 어리니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죽자마자 교지를 내려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는데, 이는 그동안 왕이 죽은 국상 중에 정사와 인사 조치를 중지하는 관행을 깬 파격 행보였다. 물론 정순왕후는 자신의 친인척과 사도세자의 폐위를 주장한 벽파의 인물들로 채웠는데, 이후 반대파인 시파를 숙청하는데 앞장서기 시작한다. 반대 세력인 시파를 숙청하는데 앞장선다. 정조가 재위 내내 힘쓴 탕평의 정신이 완벽하게 기울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시파의 몰락을 위해 정조도 묵인하였던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는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켰는데 세계 천주교사에서 가장 심한 박해라고 평가 받는 대대적인 숙청이였다. 이로 인해 수없는 사람들이 죽었고, 대부분 시파였는데 대표적으로 정약용 셋째형 정약종이 처형되었고 정약용 역시 유배를 당한다. 

사실 정조는 자신이 죽기 전, 정순왕후와 벽파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자신의 어린 세자(순조)가 위기에 쳐해지고 시파가 무너지며 자신의 탕평이 무위로 돌아가거나 사도세자의 추숭이 불가능해 질 것을 예상했다. 이에 정조는 유언을 남겨 시파에 속한 김조순(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정순왕후와 조정 역시 김조순이 시파여도 정조의 유언을 뒤집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정순왕후의 수렴이 끝난 1804년, 그녀 자신과 벽파는 순조의 장인인 안동김씨 김조순에 의해 몰락하며 허망한 말년을 보내다 1년뒤 1805년 창덕궁에서 눈을 감는다.  이후 경기도 구리의 동구릉 내에 영조와 같이 묻힌다. 

 


정순왕후의 평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많은 대중매체에서는 정조의 개혁을 무너트리고 세도정치를 불러오게 한 악녀로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정조 사후 수렴청정기간 동안 신유박해를 비롯하여 정조의 개혁을 무너트린 것에 대한 비판은 피할길이 없다. 

 

다만 세도정치를 불러온 것이 정순왕후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오히려 자기가 그렇게 숙청했던 시파였던 안동김씨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세운 것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벽파의 집권을 우려한 순조를 향한 정조의 유언이 안동김씨에게 세력을 주었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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