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조선 세도정치의 억울한 희생양 이하전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0. 5. 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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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도정치의 억울한 희생양 이하전 그는 누구인가?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폐단과 그로인한 왕권 약화 그리고 백성들의 피폐함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곧잘 접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 안동김씨의 눈에 찍혀 억울하게 사사당한 왕족이 있다. 그가 바로 도정궁 이하전이다. 이하전 그는 누구일까? 

 

<바람과 구름과 비> 이하전 역할의 이루

|이하전 그의 족보

 

1842년 헌종 8년 도정궁에서 태어난 이하전은 선조의 아버지였던 덕흥대원군에서 갈라져 나온 후손이다. 여기서 도정궁은 조선 선조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과 그 중손들이 머물던 종갓집으로 지금의 종로에 위치해 있다.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후손들에게 당상관 돈녕부 정3품 도정직이 세습되게 되면서 도정궁이라 불린 곳이다. 

 

이하전이 태어난 후 1년만에 아버지 완창군이 죽자 도정궁을 이어받는 사손이 되었다. 음서제로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 올라 벼슬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나름 중요 요직들을 두루 겸임한다.

 

도정궁

|이하전 안동김씨에 맞서다 죽는다

 

이하전이 관직에 머무를 때는 이미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있을때로서, 그는 철종에게 왕족의 신분으로써  "여기가 이씨의 나라이냐, 김씨의 나라이냐"며 세도정치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안동김씨는 이하전을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는데, 1862년 일이 터진다. 오위장 김순성과 이극선 등이 역모를 모의한 죄로 무고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김순성이 이하전을 왕위에 올리기로 했다고 진술하며 그 화살이 이하전에게로 돌아간다. 

결국 1862년 이하전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이후에도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도 이하전을 끝없이 탄핵하자 8월, 21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는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안동김씨가 이하전을 죽이기 위해 조작한 역모라는 설이 많다. 철종의 후손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똑똑한 왕족들을 제거하려는 안동김씨의 모략이라는 것이다.

 

|이하전 그가 죽은 이유

 

이하전이 사사 당한 후, 그 아버지였던 완창군 역시 도정궁의 사손지위를 박탈 당하는 치욕을 걷는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고 1872년 도정궁 사손에 다시 이하전을 임명하면서 신원복권이 되었다. 이름이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비슷하여 형제지간 같지만 이하전은 흥선대원군의 손자들인 순종, 영친왕 등과 같은 항렬이다.  

 

이하전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는 그가 안동김씨에 반발했던 왕족이라는 점과 당시 총명하기로 소문난 왕족이어서 철종의 뒤를 이은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안동김씨가 이하전이라는 후환을 미리 잘랐다는 설이 많다.

그러나 이하전은 이미 중종의 아들 대에 갈라져 명종의 양자로 들어온 선조 때부터 왕족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거리가 있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이씨 왕족이 더이상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귀하긴 해서 주목을 받은 것 같지만 그래도 왕권을 잡기에는 너무나도 멀어서 철종의 뒤를 잇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안동김씨에 반발했던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그가 죽은 이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이하전의 부인인 서대혜는 이후 대한제국 시기 계몽교육을 위해 헌신했고 1908년 양며느리와 함께 양심여학교를 세우고 자금을 후원했다. 이 양심여학교는 왕실의 종친이었던 이재극과 김인화가 설립한 동덕여자의숙으로 합병되었고 이후 동덕여자의숙은 동덕여학교 그리고 동덕여중, 동덕여고, 동덕여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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