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의 정실 왕비 효의왕후 김씨 현명했던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조선 정조의 정실 왕비 효의왕후 김씨 현명했던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Posted at 2021. 9. 14. 22:30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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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의 정실 왕비 효의왕후 김씨 현명했던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조선 후기의 성군 정조, 너무나도 잘 아는 왕이지만 막상 정조의 왕비가 누구였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특히 의빈성씨(문효세자)와의 사랑 이야기는 잘알려져 있지만 그의 정실 부인 효의왕후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현명하고 온화했다고 전해지는 효의왕후 김씨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드라마 <이산>에서 효의왕후 역을 맡은 박은혜

|효의왕후 김씨의 가문과 출생 

 

효의왕후 김씨는 1753년(영조 29년) 청풍김씨 김시묵과 남양홍씨의 딸로 태어났다. 그 아버지 김시묵은 대사간,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이후 병조판서와 공조, 호조 판서까지 오르는 등 능력 있는 신하였다.

 

그의 시어머니 혜경궁홍씨가 지은 <한중록>에 의하면 당시 시아버지 영조는 윤득양의 딸을 남편 사도세자는 김시묵의 딸을 마음에 들어했으며 결국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가 간택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영조가 자신의 아버지 숙종을 낳은 할머니 명성왕후와 같은 청풍김씨 가문이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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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손빈 효의왕후 

 

효의왕후가 가례를 올리고 4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녀의 시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궁궐은 난리가 났고 영조 역시, 자신이 선택한 그 비극속에서 며느리 혜경궁 홍씨와 손자의 아내 효의왕후를 궁에서 떠나 친정으로 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효의왕후는 10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시어머니인 혜경궁홍씨를 모시겠다는 말을 하였고 어쩔수 없이 혜경궁홍씨의 친정집으로 함께 가도록 한다. 생각해보면 10살의 나이에 매우 정확한 판단을 한것이며 그 효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결과론적으로 이러한 효의왕후의 행동은 영조의 이쁨을 받게 한다.  

보물로 지정된 효의왕후 한글글씨

|왕비가 되다.. 정조와의 금슬

 

1776년 정조가 왕에 오르자 효의왕후 역시 왕비가 되었다. 사실 왕비가 되기전 그러니까 정조가 세손일때는 부부금슬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긴 하다. 한중록과 이재난고의 기록에 의하면 세손이 빈궁과 금실이 친밀치 않은데다가 라는 대목이 각각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의왕후가 중전이 되자 한중록에서는 다시 '중전과 관계를 회복하시어 부부 화락'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으로 보아 점점 나이를 먹고 위기를 극복해가면서 부부관계가 좋아짐을 알 수 있다.

 

|효의왕후의 성격

 

효의왕후의 성격과 품행에 대해서는 수많은 기록에서 칭송을 하고 있다. 인자하고 효성스러웠으며 검소하였다고 전해진다. 효심이 깊었기 때문에 혜경궁홍씨, 의붓시할머니 정순왕후 김씨를 챙겼고, 시누이였던 청연군주, 청선군주와도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영조의 딸이면서 유독 정조와 자신의 사이를 벌리려 이간질을 자행했던 시고모 화완옹주에게 마저도 극진히 대접했다고 전해진다. 

시어머니 혜경궁홍씨가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을 때는 약과 반찬의 맛을 일일히 보며 극진히 모셨고, 궁에서 남는 음식이 있어도 '궁중의 재물은 공물이니 사가의 어버이에게 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완벽한 품행을 보였다. 

 

"효의왕후는 중궁의 자리에 24년을 계시고 동조의 자리에 21년 동안 계시었으나 내전의 말이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라고 할 정도로 인품 있는 왕비였던 것이다. 

임신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이 국조의 고사를 인용하여 존호를 올리자고 청하니, 효의 왕후가 굳이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않은 것은 지극한 애통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미망인이 혼자 존호를 받는다면 선왕의 의리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하니, 신하들이 모두 감복하여 다시 청하지 않았다. 뭐 그냥 완벽하다.

효의왕후와 정조가 묻혀 있는 건릉

|임신하지 못한 슬픔

 

효의왕후는 알다시피 정조의 아이를 끝내 임신하지 못했다. 심지어 1787년 상상임신을 하여 산실청을 설치까지 했으나 1년이 넘도록 출산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당시 조선 더군다나 왕비로서 정조의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 상상임신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후사를 낳지 못해 정조는 의빈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와 순조를 효의왕후에 입적시킨다.

 

|의빈성씨와 관계

 

효의왕후와 의빈성씨는 정말 친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효의왕후 입장에서는 정조가 정말 사랑했고 아들까지 낳은 의빈성씨를 질투하거나 괴롭힐법 했는데, 정말 친했다고 전해지는 것을 봐서는 다시 한 번 효의왕후의 인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튼 효의왕후와 의빈성씨는 동갑인데다가 궁에 입궁한 것도 10살로 같기 때문에 더더욱 친밀해졌을 것이다. 정조가 의빈성씨가 죽고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보면 의빈성씨는 죽기 전날 밤에도 효의왕후 처소에 정조가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했을 정도라고 하며 효의왕후 역시 의빈성씨가 죽을 때 목놓아 울었다고 전해진다. 


효의왕후는 1800년 정조가 죽고 왕대비가 되었으며 1821년 창경궁에서 승하한다. 향년 67세로 정조의 건릉에 합장되어 지금 화성시에 묻혀 있다. 고종이 황제가 되고 선황제들을 추존하면서 효의왕후 역시 황후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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