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척화론자이자 흥선대원군의 동지였던 안동김씨 김병학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0. 5. 30.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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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론자이자 흥선대원군의 동지였던 안동김씨 김병학 그는 누구인가? 

조선 세도정치를 대표하는 안동김씨 가문과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는 무수한 영화나 드라마 작품을 만들어낼 정도로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 소스 중 하나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농락했던 안동김씨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 고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복수를 했을거라 생각했지만 사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안동김씨는 정치적인 동반자로써 대우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안동김씨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병학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 김병학

|김병학 그는 누구인가?

 

김병학은 본관이 안동이며 철종의 장인인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조카이며 동생으로는 김병국이 있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김씨인 덕분에 1853년 과거급제 후 곧바로 대사헌과 판서를 역임한다.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올라 흥선대원군이 안동김씨 세력을 몰아낼 때도 고종 즉위를 뒤에서 밀어주고 딸을 며느리로 맞이할 것을 약속한 덕분에 1864년 이조판서 자리에 오른다.

 

이후 1년만에 공조판서와 좌천성 좌의정까지 승진하며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동지로 성장해나간다. 안동김씨의 수장이었던 김좌근과 함께 철종실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자신의 동생 김병국과 함께 고종 집권 시에 안동김씨 가문을 이끌어나갔던 인물이다. 

 

척화비

|대표적인 척화론자 김병학

 

김병학은 흥선대원군 저리갈 정도로 대표적인 척화론자로 꼽힌다.(외세의 문물을 절대 받아드려서는 안된다는)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탄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려 했지만 그조차도 좌시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천주교 탄압을 주장했다. 

또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 척화론의 대표주자였던 이항로를 천거하는 등 조선의 빗장을 걸어잠근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영의정에 올랐을 때는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의 체결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자는 개화파와 의견을 끝까지 달리 했다. 

 

심지어 죽기전에도 인천의 개항은 절대 허락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을 정도로 뿌리까지 척화론자였다.

 

|또 하나의 실책 '당백전'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집권하자 마자 경복궁 중건이라는 무리한 건축공사를 감행한다. 하지만 이때
조선은 이미 가난했고 백성들은 힘들어하고 있던터라 경복궁 중건은 너무나 힘든 프로젝트였다. 

그러자 당시 좌의정이었던 김병학이 당백대전을 주조하여 당시 쓰이던 통보와 함께 사용하게끔 흥선대원군에게 안을 올렸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옳다구나 하여 당시 상평통보의 최고액권이었던 당이전에 50배격인 당백대전을 무분별하게 주조하기 시작한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비참하여 조선경제에 초인플레이션이 오게되었고 안그래도 위태했던 조선경제는 엉망이 되어버린다. 김병학과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을 위한 패착이었던 것이다. 

 


김병학은 안동김씨였지만 자신의 동생 김병국과 함께 흥선대원군과 생각을 같이 한 인물이었고, 죽기전까지 척화론자였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당백전이라든지 척화론이라든지 당시 조선에 있어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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