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철종의 할아버지이자 비운의 왕자라 불리는 은언군 그는 누구일까?

윤여시 2021. 1. 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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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할아버지이자 비운의 왕자라 불리는 은언군 그는 누구일까?

사도세자의 서장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그처럼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왕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끊임 없는 죽음의 위협속에서 가족들마저 모두 비참하게 생을 마감 했기에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 할 수 있겠다. 은언군 그는 과연 누구일까? 

 

|은언군의 출생과 성장

 

1754년 사도세자와 궁녀였던 임씨(숙빈 임씨)의 아들로 태어난 은언군은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아들 정조 다음에 태어난 인물이다.

 

사도세자는 궁녀와 은언군을 낳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 아버지 영조가 화를 낼까 두려워 했는데 혜경궁 홍씨가 도와줬다고 한다. 이후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 사도세자는 물론 혜경궁 홍씨까지 크게 혼냈다고 하니, 은언군의 출생부터가 녹록치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 9살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을 겪게되고 궁에서 나가 살다가 1년 후 은언군에 봉해진다. 그러나 출궁한 왕자의 신분으로 먹고 살길은 요원했고 힘든 와중에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으로부터 돈을 지원받았다가 김귀주 등이 이를 두고 탄핵한다. 

 

그래도 왕자인지라 1768년(영조 44년)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에 임명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었으며 숭헌대부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1769년 영조에게 용동궁을 사저로 받는 등 나름 지원을 받게 된다. 

 

|은언군의 사건 사고

 

은언군은 여러 사회적 물의에 휘말리게 되는데, 먼저 1771년(영조 47)에는 하인들을 유난히 많이 끌고 데리고 가마를 타고 다닌다 하여 동생 은신군과 함께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고, 시전 상인들에게는 돈을 갚지 않아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는 제주도까지 유배를 보냈다가 3년만에 풀려나게 된다. 

 

영조가 죽고 조금은 숨을 쉬나 했더니 자신의 집에서 소를 몰래 도살하여 파는 물의를 일으켜 또 탄핵을 당했으나 이복형인 정조가 이를 막아주었다. 

 

|은언군, 역적의 아버지가 되다

 

정조시대 실세였던 홍국영이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가 후사가 없자, 이를 기회로 삼고자 누이 원빈홍씨를 후궁으로 들였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이듬해 사망하게 되자 은언군의 장자 이담을 원빈홍씨의 장례에 양자로 들여 세자 책봉을 할 계략을 꾸민다. 물론 은언군은 이를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홍국영의 거듭된 요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수락을 해준다. 

이 때에 은언군은 유학 이덕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는데, 첩 이씨와 낳은 서자의 손자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여튼 홍국영은 은언군의 아들이자 양자로 들어간 이담을 완풍군 (후에 상계군으로 개칭)이라 부르면서 정조 다음 왕위를 잇게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이후 홍국영이 실각하고 병을 얻어 죽었음에도 그의 무리들은 상계군을 정조의 다음 보위에 오르게 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게된다.  

그러나 상계군의 외조부였던 송낙휴가 상계군의 불온한 행동을 고해 바치면서 일은 역모사태로 커지게 되고, 상계군은 유배를 떠나 자살을 하게된다. 거기에다 그 아비 은언군마저 유배를 보내고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왔다. 그러나 정조는 은언군을 유배형으로 결정해 강화도로 보내게 된다.  

 

 

|은언군, 강화도 유배생활

 

그러나 상계군의 외조부였던 송낙휴가 상계군의 불온한 행동을 고해 바치면서 일은 역모사태로 커지게 되고, 상계군은 유배를 떠나 자살을 하게된다. 거기에다 그 아비 은언군마저 유배를 보내고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왔다. 그러나 정조는 은언군을 유배형으로 결정해 강화도로 보내게 된다. 강화도로 유배된 이후에도 은언군을 죽이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나 정조는 이를 막는다. 

 

오히려 정조는 비밀리에 변복을 하고 강화도 입구에서 은언군을 만나 한성으로 오는 행동을 보이니 대신들은 물론 정순왕후마저 노발대발하여 은언군을 다시 강화도로 유배 보낸다. 이후 은언군은 혜경궁 홍씨와 정순왕후 등의 생일에만 잠깐 한성에 왔다가 다시 강화도로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1789년부터는 은언군이 강화도를 계속 벗어난다는 탄핵이 쏟아졌으나 정조가 이를 계속 막는다. 의금부, 의정부,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승정원 등도 날이면 날마다 은언군을 탄핵하였으나 정조는 궁에서 나와 하룻밤을 묵으며 은언군을 몰래 만나는 등 형제의 우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거기에다가 은언군이 눈치도 없이 강화도를 탈출하려다 붙잡히며 그 목숨마저 위태로워졌다. 


더군다나 정조가 갑자기 등창으로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상소는 들불처럼 거세졌고 정조도 이미 세상에 없는지라 그의 목숨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워진다. 

 

절두산에 있는 은언군과 상산군부인 비석

은언군, 이번에는 천주교와 엮이다

 

1801년, 당시 정순왕후와 노론은 천주교 신자를 박해하고 있었는데, 신유박해 때 의금부에 체포된, 한 나인의 진술이 은언군의 부인이었던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 신씨가 청나라의 천주교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음이 밝혀지고, 상산군부인 송씨가 양제궁에 선교사를 숨겨둔 것이 밝혀지면서 그의 아내와 며느리가 순교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은언군이 자신의 서자 이철득과 함께 유배지 가시덤불 장벽 사이로 빠져나와 도망쳤다가 잡히게 되어 1801년 3월 사약을 받고 사사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이후 첩 이씨에게서 얻은 아홉째 아들이자 서자인 이광의 아들 셋 중 셋째 이원범이 살아남아 철종의 자리에 오르니 그때 복권되었으며 고종때는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게된다.

 


평생을 죽음의 문턱에서 살고자 했던 왕자였고, 결국 천주교에까지 얽히면서 죽음을 맞이한 은언군, 어쩌면 그를 조선시대 가장 비참했던 왕족이라 부르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은언군이 등장한다고 하니 어찌 등장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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