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사태로 보는 아편전쟁홍콩 사태로 보는 아편전쟁

Posted at 2014. 10. 27. 23:46 | Posted in 세계사/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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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태로 보는 아편전쟁


한 동안 중국 정부를 상대로 들고 일어났던 홍콩 시위가 잠잠 해졌나보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에 자치권 요구와 민주주의 선거를 요구 했던 홍콩 시민 그리고 학생들... 그들이 이렇게 민주주의를 갈망하게 된 것은 바로 약 180여년전의 아편전쟁 때문이다. 아편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까?





홍콩은 우리나라의 마치 우리나라의 강화도나 거제도 처럼 본토와 떨어진 섬이지만 지금은 다리와 지하철 등으로 육지와 다를 바 없는 섬아닌 섬이 되었다.

 


|아편전쟁의 배경

 

영국과 중국의 무역은 1689년부터 시작되었다가 1715년에 이르러서야 영국 상관이 설치되며 본격적인 중국과의 교역이 시작되었다. 영국이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은 도자기, 차였으며 특히 그 향과 맛이 일품인 중국의 차는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반해 영국은 청나라에 모직물을 수출하였으나 당시 청나라는 비단이 아닌 모직물은 야만인이나 입는 옷으로 취급하였기에 멕시코에서 얻은 은화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게만 된다. 이에 영국은 자신들의 무역 적자를 막고자 지금의 마약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한다.


아편은 처음에는 약재로 사용되어졌으나 마약의 개념으로 점차 바뀌기 시작하면서 중국인들의 보건, 경제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히기 시작한다. 이러한 아편의 단점들이 시시각각으로 올라오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1729년 옹정 7년에 아편금지법을 제정한다.


그러나 이미 퍼질대로 퍼지기 시작한 아편은 금지령을 뚫고 민간, 관료들까지 피우기 시작했고 아편 수입량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기 시작한다. 이에 청나라 황제 도광제는 아편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 법뿐 아니라 아편 밀수에 대해 철저하게 금하는 규제 정책을 피려 하였으나 이에 영국이 곧바로 중국의 이 같은 아편 금지 조치에 반발하여 구매하는 쪽이 있기 때문에 파는 것이다라는 논리로 맞선다.





아편은 양귀비의 꽃에서 나오는 유액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중독 환각 셩분이 있는 일종의 마약이다.

 


이에 도광제는 고심 끝에 호북과 호남에서 아편을 철저하게 금하는데 공을 세운 흠차대신 임칙서를  광주에 파견한다. 임칙서는 총명하고 여러 재해 구제 사업에 있어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로 그 성격이 매우 엄했다. 


특히 임칙서는 자신의 동생이 아편중독으로 폐인이 되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아편에 대해 치를 떨었으며 이 같은 이유로 광주 총독에 임명 되자마자 아편에 대한 칼을 빼들기 시작한다. 광주에 도착한 임칙서는 앞으로 영원히 아편 반입을 금하며 이제부터 아편 반입을 할 경우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모두 몰 수 할 것이다라는 것에 동의하는 서약을 보내라는 포고문을 써서 외국 상인들이 모여 있는 상관에 보냈으며 이 포고문은 영국 상인들에게도 전해지게 된다. 


처음에 영국은 임칙서의 이 같은 반응에 뇌물을 주면 돌아설 것이라 보고 아편 1천 상자를 건네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임칙서는 영국이 보관하고 있는 아편 상자가 2만 상자가 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군사를 동원 영국의 상인들이 있는 곳을 포위하고 영국 상인 대표 엘리엇에게 아편 2만 상자를 받아낸다.


임칙서는 아편 2만 상자를 해안에 구덩이를 파고 아편 성분을 없앤 후 모두 버렸는데 외국 상인들은 이런일이 있음에도 임칙서가 요구한 서약을 제출하지 않았다. 이렇게 청나라와 영국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진행 될 무렵 구룡에서 술에 만취한 영국 선원이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임칙서는 마카오에 있는 엘리엇에게 범인의 인도를 요구 했으나 엘리엇이 이를 거부하자 청나라는 마카오를 무력으로 폐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에 반발한 영국이 군함을 이끌고 청나라의 배에 포격을 시작하면서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를 시작으로  청나라는 모든 무역항을 봉쇄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고 영국은 곧바로 이에 반발하여 인도와 스리랑카에 머물고 있떤 보병 포함 포병과 육군 병력에 동원령을 내린다.





서양이 동양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대표적인 전쟁 아편 전쟁


|아편전쟁의 시작과 전개


1840년 6월 마침내 아편전쟁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에 비해 영국은 군사력과 기술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에 청나라 군대는 도망가기에 바빴다. 결국 계속 북상하는 영국군의 기세에 놀란 청나라 조정은 임칙서를 파직하고 새로운 총독으로 기선을 임명하여 교섭하게 했다. 이때 영국은 


1.홍콩의 할양

2.배상금 지불

3. 교섭권 인정

4. 무역의 재개 


내용을 골자로 하는 조약을 강요했고 청나라 조정이 이를 반대하자 영국군은 함대를 이끌고 주산 열도 점령을 시작으로 승승장구로 북진하기 시작한다. 영국군은 남경을 위협하는 한편 북경을 공격할 태세마저 보이니 조정의 도광제는 1842년 영국 군함 콘 월리스 호에서 위의 모든 조약을 받아들인다는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다.


이에 아편 밀수입은 전쟁전보다 더 성행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미국, 스웨덴 , 노르웨이 등과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면서 청나라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조약들을 잇따라 맺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후 홍콩의 역사 전개


1차 아편전쟁 이후 홍콩은 영구히 영국의 땅이 되었고 이후 2차 아편전쟁을 거쳐 1860년 카오룽반도마저 영국의 땅이 된다. 그러나 1898년에 영국은 중국과 홍콩 및 그 주변 섬지역 해역을 99년간 임차하는 협정을 맺게 되고 홍콩은 영국의 보호 아래 중국 본토의 사회주의와는 무관하게 자유항구이자 무역 중심으로써 그 부를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중국에게는 영국에게 넘어간 홍콩이 발전해가는 모습이 자신들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혔고 임차조약을 잊고 홍콩 침공이 될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홍콩이 점점 발전하고 중국의 거대한 소비시장이 되어주자 중국은 경체 특구로 지정하는 등 애지중지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홍콩은 쇼핑과 금융의 중심지로 떠오른 중국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경제적 기반이 된다. 


이후 1972년 영국과 중국의 국교가 수립되며 1982년 홍콩반환협상이 시작되고 영국의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1996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중국에 홍콩을 반환하겠다는 공동선언에 1985년 서명하게 된다. 그러나 홍콩 반환후 50년간은 홍콩의 독자적인 사법, 금융, 경찰 제도는 유지하기로 했으며 1997년 7월 1일 영국의 식민지배를 완전히 청산하고 홍콩은 중국의 1국가 2체제를 받아들여 인권과 자유의 보장 다짐속에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임명된다. 




 

그리고 홍콩의 우산혁명


|홍콩 우산혁명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돌려준지 언 20여년이 다되간다. 비록 중국에게 홍콩은 돌아 갔으나 영국이 뿌려놓은 자유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적 정치 참여에 대한 욕구는 모든 홍콩 시민의 마음속에 묻혀 있었다. 역사를 알면 지금에 일어나는 일을 이해 할 수 있기에 홍콩이 왜 중국땅이면서도 다른 색깔을 지닌 땅이 되었는지 다른 경제, 자치권을 갖을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편하다. 


앞으로 중국 정부가 홍콩의 이 같은 자유와 자치권에 대한 열망을 어떻게 매듭지어갈지 여부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도 자유를 맛본 국민에게 이를 억압하는 

국가의 시도가 먹힐 수 있는지 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홍콩을 단순히 쇼핑 관광지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들이 걷는 행보를 기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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