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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프로파간다, 선전의 제왕 파울 요제프 괴벨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윤여시 2019. 10. 23.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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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프로파간다, 선전의 제왕 파울 요제프 괴벨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인류 최악의 재앙이라 평가 받을만한 집단을 꼽으라면 누구나 나치를 손꼽을 것이고 그리고 이 나치를 대표하는 인물을 뽑으라면 단연 히틀러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나치와 히틀러에게는 꼭 필요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선전, 프로파간다 하면 떠오르는 인물 '괴벨스'다.

 

나치의 선동 전문가이자 히틀러를 총통으로 올려 놓은 인물 파울 요제프 괴벨스 그는 과연 누구일까?

 

파울 요제프 괴벨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성장

1897년 독일에서 태어난 괴벨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다른집에서 하녀로 일하다 괴벨스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6남매중 넷째로 4살이던 1901년 4살 때, 골수염을 앓는 바람에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평생을 살게 된다. 괴벨스는 그 굽은 다리를 극복하기 위해 지식을 습득하는데 치중했고 덕분에 어려서부터 상위권의 성적을 늘 유지해오며 열등감을 극복해왔다. 

괴벨스의 부모는 괴벨스가 사제 교육을 받길 원했지만 괴벨스는 인문계로 진학을 했고 특히 독일어를 다루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십대 후반에는 쭉 1차세계대전의 시기였고 1917년 그가 대학생활을 할 때에는 이미 독일은 패전으로 인해 몰락을 했고 괴벨스를 비롯한 독일 청년들의 미래 역시 암울해져만 갔다.


또한 괴벨스는 박사 학위까지 땄으나 당시 독일의 암울한 시기와 겹쳐 취업에 번번히 실패하거나 취업하여도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여기에 나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당시 득세하고 있던 유대인 자본에 대한 적개심 역시 이때부터 커져가게 된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나치 입당과 히틀러와의 만남

괴벨스는 그의 인생과 독일의 암울한 고난의 시기에 새로운 희망이 나타나길 바랬는데, 그 희망이 등장하니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1923년 11월 히틀러는 당시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나치당을 동원해서 바이에른 주정부 요인들이 모여 있는 뮌헨의 맥주홀을 점거한 이른바 맥주홀 폭동으로 히틀러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된다. 

허접한 쿠데타는 곧 진압되고 히틀러는 반역죄로 재판에 들어갔지만 히틀러는 그 법정을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연극 무대로 활용하며 독일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후 1924년 8월, 우익집회에서 괴벨스는 유대인과 볼셰비키를 싸잡아 비난했고 조그만 <민족의 자유>라는 극우 주간지의 편집인이 됐다. 괴벨스가 역사속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4년 12월 히틀러가 출소하고, 그는 나치당에 정식 입당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치당은 이념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정당이었는데 왕당파, 국가주의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섞여있었다. 특히 북독일나치당의 지도자 그레고르 슈트라서는 나치당 내의 좌파세력의 중심인물로 히틀러의 라이벌이었다. 이때 괴벨스 역시 자본주의 체제를 극혐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파세력에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상대적으로 온건했고 전통보수세력과 자본가 계층과 친했다. 아무리 히틀러를 좋아했던 괴벨스지만 그는 히틀러의 우경 노선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1925년 11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히틀러를 만나게 된 괴벨스는 히틀러의 마력에 푹 빠지게 된다.

그는 " 이 남자는 왕이 되는 데 필요한 덕목을 완벽히 갖추었다. 타고난 호민관이자 떠오르는 독재자"라고 히틀러를 표현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히틀러와 함께 하다!

1926년 히틀러는 괴벨스를 나치당의 중심지인 뮌헨으로 초청했다. 그는 당시만하더라도 독일 북서부인 루르대관구장이었는데,  히틀러의 주선으로 나치의 시작인 뷔르거브로이 맥주홀에서 2시간 동안이나 연설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히틀러 역시 괴벨스를 안아주었고, 괴벨스는 완전하게 히틀러의 사상으로 흡수된다.

이후 1926년 10월, 괴벨스는 베를린대관구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베를린은 나치당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독일은 북부와 남부간의 지역갈등이 심한다. 남부 바이에른에서 만들어진 나치당은 베를린에서는 인기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괴벨스는 베를린에서 나치당이 눈에 띄기 위해서는 센세이션한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괴벨스는 11월, 정치깡패라 불릴만한 나치돌격대를 동원해 정치선전 시위를 벌였다. 당시 베를린을 장악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이 같은 선전에 발끈하여 거리로 몰려 나왔다. 곳곳에서 패싸움이 일어났고 총성이 울리며 시민들은 나치당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말한다. 

"거리를 정복할 수 있으면 대중을 정복하고 대중을 정복하면 국가를 정복한다" 그는 이일을 계기로 베를린대관구 부설 웅변학교를 건립하고 선전선동요원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그의 선전을 통해 많은 나치당의 당원들이 충성을 맹세했고 곳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하며 단합해 나갔다. 그와 나치당원들은 청중의 분노와 감정을 자극하며 선전선동을 하였고, 사람들은 이에 현혹 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호르스트 베셀이라는 인물이었는데, 나치의 충성스러운 돌격대로 공산주의자들과 끝없는 폭력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1930년 1월 공산주의자들의 습격을 받아 중태에 빠졌는데 괴벨스는 이후 베셀의 상태를 끊임없이 기관지에 실었고 베셀이 고통가운데 죽자 노래를 만들었으며 이 노래는 나치시대의 국가로 활용되기도 한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선거의 승리와 히틀러를 총통자리에 올려놓다

괴벨스의 선전활동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여 1928년 총선에서 괴벨스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경제대공황이라는 시기를 발판삼아 1932년, 총선에서는 나치당이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1932년 히틀러는 괴벨스의 권유를 통해 총통에 당선된다. 

히틀러가 총통이 된후 나치는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국회의사당에 불을 내고 멍청한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 청년을 범인으로 잡아 반역죄를 뒤집어 씌웠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발령, 전체주의 국가로 독일은 향하게 된다.

이때 괴벨스는 “독일 민족이여, 이제 일어나라! 일어나서 판결을 내려라! 3월 5일 이 세계의 붉은 역병(疫病)에 대해, 국민의 이름으로 신(神)의 재판이 시작될 것이다! 히틀러는 행동할 것이다! 히틀러는 행동할 것이다! 그에게 전권을 부여하라!” 

 

이후 괴벨스는 1934년 신설된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자리에 올랐다. 역사상으로 선전담당 부서가 대놓고 등장한 것이다. 괴벨스는 독일의 국민을 빠져들때까지 세뇌시키기로 작정했다. 이후 젊은 청년들을 대거 등용하여 선전부를 만들고 언론을 장악한다.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통해 좌파 언론 및 유대계 언론사들은 일제히 폐간되었다. 

통신사는 독일통신사로 통합되었고 편집권에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했다. 언론인이 되려면 선전부의 회원이 되어야 했고 사상검증과 아리안 인종임을 입증해야 했다. 글씨크기와 기사에 사용되는 단어 뉘앙스까지도 완벽히 장악했으며 당시 세상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라디오를 활용하여 국민을 완전히 장악했다. 

괴벨스는 저가형 라디오를 제작하여 국민들에게 보급했고, 이를 통해 방송 역시 장악해 나간다. 사람들이 라디오를 괴벨스의 주둥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상징조작도 잘했다. 1933년 3월 21일 국회 개원식에서 독일인들의 영웅 프리드리히 대왕이 잠들어 있는 가르니송교회에서 개원식을 열었다. 이때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훈장을 온몸에 달았고 히틀러는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했다. 이를 본 독일 국민들은 힌덴부르크로 대변되는 영광스러운 옛 독일 제국과 히틀러가 이끌 독일의 미래에 수긍했다. 

그는 선전장관으로 많은 영화 제작에도 권력을 행사했고 영화에 출연하는 여배우들과 끊임없는 스캔들을 만들어 냈다. 그는 부인 마그다를 버리려고까지 했으나 히틀러의 경고에 마그다와 결혼생활을 했다. 국가 예산을 물쓰듯이 써 자신의 별장과 저택을 짓는 등 만행도 저질렀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2차세계대전의 선동가

괴벨스는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시작된 2차세계대전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폴란드가 독일의 소수민족에게 잔인한 행동을 한다고 보도하게 하여 독일의 분노를 이끌어 냈다. 또한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에는 미국 국무부 차관보와 스랑스 총리가 독일 분할을 모의하고 있는 그림을 그려 모의했으며 네덜란드와 벨기에 침공을 앞두고 있을 때는
두 나라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증하였지만 바로 침공했다. 

1941년에도 소련을 침공을 앞두고 공수부대를 앞세워 영국침공작전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했고 신문으로 소개 되었지만 마치 괴벨스는 실수인것 마냥 베를린 시내에 뿌려졌던 신문을 압수하면서 독일의 영국침공에 대한 관심이 쏠리게 했다. 그러나 독일은 곧바로 소련을 침공한다. 

이뿐이랴 괴벨스는 유대인 박해를 선동한 인물로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분노를 조장하고 베를린에서 유대인을 모조리 추방하는 한 편, 1938년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이 유대인 청년에게 암살당하자 이를 선동하여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이후 1943년 소련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며 전쟁이 패배직전에 몰리자 괴벨스는 총력전을 선동하고 국민들을 끝없이 전장터로 내몰았다. 

그리고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전쟁의 패배에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 그는 자신이 죽고 괴벨스가 독일 총리로 오르길 희망했다. 하지만 괴벨스가 총리가 되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수는 없었다. 5월 1일, 괴벨스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독살하고 자기도 자살한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괴벨스 그의 사악한 신념은 그의 죽음이 자살로 끝나기에는 너무나 아까울 정도로 지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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