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서양

로마 VS 카르타고 한니발 제2차 포에니 전쟁

윤여시 2014. 6. 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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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VS 카르타고 한니발 제2차 포에니 전쟁


로마와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피할 수 없는 포에니 전쟁을 시작한다.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을 두고 맞붙었던 두 나라의 제 1차 포에니전쟁이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서 카르타고는 무자비한 로마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고 국력이 기울게 된다. 그리고 그 후 30여년이 지나고 카르타고에 영웅이 등장하니 이가 바로 '한니발' 이다.





로마 VS 카르타고 지중해 패권을 둔 한니발의 등장 

  

|한니발은 누구?


불세출의 영웅 한니발은 기원전 247년에 하밀카르 바르카 장군의 아들로 태어난다. 당시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는 에스파냐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카르타고의 명령을 받고 에스파냐로 갔으며 이때 한니발은 아버지를 따라가게 된다. 한니발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나라인 카르타고를 패하게 만든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깊숙히 품고 있었으며 로마에 원수를 갚겠다는 다짐을 품고 자란다. 


한니발이 25세가 되던 해 에스파냐 지역은 한니발의 지배로 더욱더 강한 카르타고의 영토로써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한니발은 로마에 제 1차 포에니전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에스파냐 영토를 이용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후 한니발이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의 로마와의 협약을 어기고 팽창정책을 펴기 시작하자 로마와의 잦은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제 2차 포에니전쟁 발발


선제 공격은 역시 한니발이 시작했다.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로마의 동맹국인 사군툼을 공격하며 전쟁을 시작한 카르타고에 로마는 곧바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이 시작 되었다. 기원전 218년 3월 한니발은 이곳에서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전략을 내놓는다. 


바로 5만이 넘는 보병과 9천의 기병 그리고 80마리가 넘는 코끼리부대로 피레네 산맥을 넘는 무지막지한 전략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 같은 전략에 카르타고 군을 막기 위해 늙은 스키피오가 이끌고온 로마 군사는 카르타고 군대를 놓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전략은 한니발의 카르타고 부대 역시 큰 타격을 가져온다. 피레네와 프랑스 그리고 알프스를 넘으면서 혹한과 폭설 산악부족들로 인해 2만 6000여명의 군사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포에니전쟁의 시작


|제 2차 포에니전쟁 전개


그러나 한니발은 포기 하지 않고 마침내 로마의 본토 지금의 이탈리아 북부의 포강유역에 도착했고 여기서 당시 로마의 적이자 야만인으로 불렸던 갈리아인들을 모아 병력을 보충했다. 


이제 로마 역시 한니발군을 두고볼 수 없었다. 로마는 늙은 스키피오와 셈프로니우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시칠리아에 있는 군대를 파견해서 한니발의 전진을 막으려고 했으나 트레비아강 유역에서 카르타고군의 매복에 걸려 첫 패전을 하고 만다.


이 트레비아전투에서 카르타고는 5천명의 피해를 로마군은 무려 3만이 넘는 병력 피해를 입어 한니발이 얼마나 전략적으로 싸웠는지를 엿 볼 수 있다.


또한 이 전투 이후 한니발은 원정군이었음에도 로마 북부에서 휴식을 취하며 다음 전투를 모색했고 우호적인 고을을 돌며 신병을 모집해 더욱 그 군세는 강해졌다. 




 


한니발의 군세가 강해지면서 로마는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급하게 군을 충원하고 맞받아칠 준비를 했으나 카르타고 군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트라시메 호숫가에서 매복을 이용하여 트라시메전투까지 승리를 가져간다. 


이후 부터는 완벽히 전세가 한니발에게 넘어가며 공성병기 부족으로 인해 로마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이탈리아 본토의 남부를 돌면서 군세 불리기 와 다른 도시와의 연합을 꾀하기 시작한다. 로마에게는 굴욕을 넘어 까딱하면 멸망의 순간까지 다가오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이에 로마는 다시 한 번 대군을 쥐어짜 남부에 포진하고 있는 한니발의 군대를 치기 위해 칸나이로 진군한다.  보병 8만과 기병 6천을 통하여 한니발을 압살하려 했다. 당시 한니발의 군대의 숫자는 보병 4만과 기병 1만뿐이었고 그 어느때보다도 전략적인 판단이 중요했던 순간이었다. 




 

칸나에 전투

 

한니발은 부메랑 모양의 진형을 구축하고 양 옆의 날개에 중기병들을 강하게 배치하여 로마군대를 포위하듯 싸우기 시작했으며 이 칸나에전투에서 로마는 7만명이 전사하고 카르타고 군은 6천여명만이 전사했으며 이 전투 이후에 로마는 모든 성들의 문을 닫고 공성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공성무기가 부족했던 한니발은 이탈리아 본토의 전역을 돌며 지지만을 호소했고 마케도니아, 시라쿠사 이탈리아의 남부도시들과의 동맹을 맺었으나 직접적인 도움은 받을 수 없었다. 


전쟁이 교착 상태가 되는 동안 로마의 또 다른 명장군인 스키피오는 에스파냐를 급습하여 카르타고를 몰아내고 아프리카 카르타고 본토를 침략하기 시작한다. 이에 카르타고는 급하게 한니발의 본대를 카르타고 본토를 불러들이게 되고 이 두 천재는 북아프리카 자마에서 만나게 된다.





자마전투 


이 전투에서 급하게 본국으로 복귀한 한니발의 군대에게는 많은 이점들이 사라져있었고 한니발은 이를 의식한 듯 대량의 코끼리 부대를 투입하여 초반에 로마군을 격파하겠다는 전술을 세우지만 로마의 스키피오는 트럼펫과 코넷을 불어 코끼리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코끼리들은 로마가 아닌 카르타고 군대를 향해 달려가 짓밟기 시작했따.


이에 진영이 무너진 카르타고 군대를 로마의 기병들이 들이닥쳐 무너트리기 시작했고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수 없는 전쟁에서 이겨 왔던 한니발의 처참한 패배였다.




 


|한니발의 최후 


이 2차 포에니전쟁의 패배로 다시 한 번 카르타고는 막대한 전쟁 보상금과 10척의 배만을 남겨두고 모두 로마로 넘어갔으며 지중해 해상권 역시 통째로 모두 로마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된다. 


로마는 처음에 한니발을 그대로 살려두었으나 회생불가로 보였던 카르타고가 로마의 생각 이상으로 회복이 빠르게 진행되자 로마는 이에 한니발의 항복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한니발은 로마와 전쟁을 벌이려던 시리아의 안티오코스3세에게로 피신하지만 안티오코스3세가 패배하자 터키에 있던 비티니아로 망명했지만 로마의 끈질긴 항복요구로 결국 음독 자살하게 된다. 


인류 전쟁사에 큰 획을 그은 한니발의 비참한 최후였다. 그로부터 2000여년이 지난 후 나폴레옹 역시 이 알프스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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