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동양

명나라 3대 황제 연왕 주체 영락제 그는 과연 누구인가?

윤여시 2016. 2. 23.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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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3대 황제 연왕 주체 영락제 그는 과연 누구인가?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나라의 기틀을 제대로 다져놓은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있듯이 같은시기쯤 명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니 바로 친조카를 살해하고 왕위에오른 육룡이나르샤에 등장한바 있는 태자 연왕 주체, 명나라의 대표 황제 영락제이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명나라 태자 주체 어린시절 


명나라 태자 연왕 주체는 1360년 5월 2일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방원이 다섯째 아들이니 이부분이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여튼 주체가 태어났을 때만해도 그 아버지 주원장은 홍건적의 두령중 한명으로 원나라를 무너트리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사실 때가 때인만큼 주체의 어머니는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알려지기로는 당연히 주원장의 정비인 마황후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또는 원나라 여인에서 태어났다는 소문도 있다. 때문에 서열도 그렇고 단연 황제에서는 멀었던 인물이다.


여하간 그는 서열도 그렇고 명나라 건국과정에서 어렸던지라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1366년 마침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홍무제가 되자 그는 나라를 안정시킬 명목으로 그의 많은 자식들과 손자들을 번왕으로 세우고 변방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홍무 3년(1370) 당시 10살이었던 태자 주체 역시 요동과 가까운 북평을 다스리는 북평왕 후에 연왕으로 봉하게 된다. 그러나 정식적으로 주체가 북평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10년 뒤 그러니까 주체가 21살때였는데 이때부터 그는 점차 명나라 황제에 오를만한 기질을 보이게 된다. 


실제로 그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그 호탕한 성격과 영민함이 대단해서 홍무제도 주체의 기질을 일찍부터 알아보았고 타고난 리더로서의 자질 역시 뛰어나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이방원과 비슷하지 않은가?



|명나라 태자 주체 연왕에 봉해지다


여튼 그는 연왕으로 북평을 다스리며 당시 남아있던 북방의 원나라 잔당은 물론 여진족을 견제해야 했다. 그는 북방의 군사들을 총괄하며 북경을 근거지로 하여 타타르 등과 싸워 승리하였고 1393년에는 아예 국경지대 수비군의 지휘관으로써 수비군을 통솔했다. 


그러던 중 1392년 황태자였던 장남 주표가 죽었는데 홍무제는 일찍부터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로 염두에 두고 있떤 연왕 주체를 황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황태자가 죽으면 그 뒤는 황태손이 이어야 하며 둘째, 셋째 아들을 이유로 들며 신하들이 거세게 반대하여 결국 죽은 황태자의 아들 주윤문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그때 주윤문의 나이가 15살이었다.


이후 1395년, 1398년 3년 사이로 주원장이 죽기전 둘째, 셋째 형이 차례로 죽으면서 연왕 주체 역시 그 상황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의 힘이 강해짐과 동시에 거만함과 도도함이 하늘을 찔렀다고 전해진다.



<정난의 변 당시 연왕 주체의 진격로 빨간색일 듯 하다>


|주체 정난의 변을 일으키다 


1398년 홍무제가 죽고 마침내 주윤문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건문제다. 건문제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홍무제의 아들들이 차지하고 있던 각 지역의 왕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의 권력을 잡고자 하였다.


하여 그는 우선 마황후가 낳은 다섯 황자 가운데 막내였던 주수를 체포하고 차례로 그의 숙부들을 왕위에서 제거해 나간다 사실 건문제가 제일 건드리고 싶었던 것은 연왕 주체였으나 그의 힘이 워낙 막강하였고 명분도 없었기에 미리미리 다른 숙부들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연왕 주체는 결국에는 자신을 없애기 위한 건문제의 행동이란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1402년 연왕 주체를 향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그는 곧바로 군사를 일으켰고 연왕은 '황제의 곁에 있는 간악한 무리를 제거하여 황실의 위난을 평정하기 위함이다'라는 명분을 세웠다. 이에 황실의 위난을 평정하기 위한 즉 정난군이라 하여 이른바 정난의 변이 일어나게 된다.정난군은 삽시간에 남하를 시작하였다. 이후 4년동안 서로 밀리고 밀리는 공방이 벌어졌다. 사실 원래는 건문제의 황군이 훨씬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결국 연왕주체가 주도권을 잡고 남경의 궁궐로 짓쳐들어간다. 


이에 건문제는 궁궐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그의 종적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중국 역사상 진정으로 행방불명된 황제가 생긴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홍무제가 죽을 당시 건문제에게 상자를 주고 평화시에는 절대 열어보지말고 위급할 때 열어보라고 전했는데 그속에는 변복할 수 있는 옷과 은자 그리고 비밀탈출지도가 있었다고 전해져 건문제는 이를 통해 탈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튼 이렇게 연왕 주체는 마침내 정난의 변에 성공하고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명나라의 위대한 황제로 추앙받는 영락제이다. 


영락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즉위식 때 내릴 조서를 작성할 신하로 방효유를 지목했다. 하지만 방효유는 상복을 입고 입궐하여 대성통곡을 하며 죽은 건문제를 향해 애통해했는데 이것을 본 영락제는 방효유에게 강제로 조서를 쓰게 하였다. 이에 방효유는 억지로 붓을 들어 글을 썼는데 거기에는 '역적찬위'라는 네글자가 쓰여있었다. 


이에 영락제는 크게 노하여 방효유를 죽이겠다 협박하였고 구족을 멸하겠다 하였으나 방효유는 자신의 십족을 죽여도 된다고 호통쳤다 이에 영락제는 방효유의 입을 두귀 밑까지 찢도록 하고 방효유의 9족은 물론 친구와 문하생까지 포험하여 그 앞에서 죽이고 방효유를 책형하는 무서움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만봐도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육룡이나르샤에 등장한 연왕 주체 영락제>


|영락제 명나라의 기반을 닦다. 

 

영락제는 우선 자신이 난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남경에서 지금의 베이징 그러니까 자신의 세력기반인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원나라가 도망간 도성위에 새로운 궁궐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금성이며 지금까지도 중국의 상징이자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락제는 자신의 참모였던 승려 도연, 환관이자 세계적인 원정을 떠난 신하로 유명한 정화를 통한 측근정치 그리고 오직 행정능력만을 7학사라는 내각을 구성하여 밀실정치를 감행했다. 이를 통해 모든 권력을 황제가 잡게 되었고 번왕들을 하나 둘 폐지하여 변방까지 황제가 다스리는 완벽한 황제의 나라로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비밀정보조직 동창을 만들어 관료들이 함부로 역심을 품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감시하였다. 이같은 중앙집권을 통해 그는 자신이 세우려 했던 나라를 손쉽게 만들어갔는데 자금성축조, 만리장성 개축 대운하 확충은 물론 정화의 서방원정은 물론 직접 변방을 정벌하여 영토를 넓혔다. 또한 당시 세계를 대표하는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스케일이 남다른 2만 8천권의 책 <영락대전>을 완성 시켜 학문 역시 발전시킨다. 


이처럼 대내적 대외적으로 만든 명나라의 전성기를 만든 영락제지만 사실 밀실정치, 지나친 대외 원정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명나라에는 크나큰 부담으로 작용하여 명나라 왕조 내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영락제의 최후


영락제의 생애 후반은 그가 벌려놓은 수많은 사업에 대한 부담과 피로를 막는데 집중되었다. 자금성, 정화의 대원정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다가왔고 자금성 대화재와 지방의 홍수와 역병으로 인해 명나라가 흔들릴 정도였다. 이에 신하들 역시 영락제의 밀실정치에 환멸을 느껴 일어나기 시작했고 영락제는 생애 후반에는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해놓은 사업을 멈춰야만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명나라의 부담은 곧 변방 이민족들에게는 기회로 찾아왔고 영락제는 다섯번째 몽골 원정에 나섰다가 사막에서 전쟁 중 병으로 죽게 된다. 1424년 일이었다. 이후 영락제 시신은 북경으로 돌아와 30명의 후궁들과 함께 순장되었는데 이때 조선출신 공녀 2명도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불쌍하다. 


영락제 연왕 주체와 조선 태종 이방원


사실 고려를 몰아내고 세워진 조선이나 비슷한 시기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는 매우 닮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방원은 대군 시절 명나라를 많이 다녀왔는데 그때마다 명나라측의 큰 환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절대 조선의 태자가 무릎을 꿇리고 잡혔다는 이야기는 역사속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며 육룡이나르샤는 픽션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이 명나라의 서울에 이르니 황제가 두 세번 보았고 우대하고 돌려보냈다. 또한 명나라 선비들 역시 조선의 세자라 하여 대단히 존경하였다. 또 연왕 주체와도 만나 술과 음식을 나누며 서로 온순한 말과 예절로 만났다 전해진다. 연왕이 말을 몰아 빨리 달려갈 즈음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휘장을 열고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 하며 지나갔다... 



이처럼 연왕주체와 이방원은 일국의 왕자로서 서로를 예의로 극진히 대접했다하니 드라마 육룡이나르샤는 허구로 봐야 함이 오를 것이다. 여튼 이방원이 자신의 동생과 형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연왕 주체 역시 자신의 조카를 죽이고 영락제가 되었으니 두 사람은 인연이 깊었고 명나라 영락제는 조선의 태종을 완전한 국왕으로 인정해주기도 했으니 이 역시 놀랍다 하겠다. 


또한 태종 이방원은 1400년에 즉위해 14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줬고 영락제는 1402년에 즉위해 1424년까지 황위를 지키니 이 기간이 조선과 명나라가 가장 친했던 순간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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