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왕건을 구하고 전사하다! 고려초 충신 평산 신씨 시조 신숭겸

윤여시 2019. 10. 2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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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을 구하고 전사하다! 고려초 충신 평산 신씨 시조 신숭겸

난세에는 인복을 타고난 영웅이 난세를 평정하고 자신의 세상을 만든다고 했던가? 후삼국시대를 통일하고 500년 왕조 고려의 시작을 알린 태조 왕건에게는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를 보좌했던 장수들은 정말 걸출했는데,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왕건을 구한 장수가 한명 있다. 바로 신숭겸이다. 

 

평산 신씨의 시조이기도 한 신숭겸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신숭겸의 생애

신숭겸은 춘천 사람으로 그의 처음 이름은 능산 본관은 평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때까지만해도 신숭겸에게 성은 없었다. 원래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으나 춘천으로 옮겨 터전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하여 이미 궁예 때부터 전장에서 승승장구를 한 신숭겸은 마군장군에 올랐지만 궁예의 폭정이 계속되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등과 모의하여 왕건을 왕으로 세우고 개국 1등 공신에 오른다. 고려를 세운 후 왕건을 보필하지만 그는 왕건과 함께 대업을 달성하지 못한다. 

 

신숭겸이 목숨을 잃은 - 공산 전투 

927년 9월,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상 북부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불현 듯 회군하여 영천을 가로질러 경주를 침공한다. 이때 신라 55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를 왕위에 올리니 이가 바로 신라 마지막 왕 56대왕인 경순왕이다. 여튼 왕건은 견훤이 경주를 침략 했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군대를 통솔하고 경주로 향한다. 

 

하지만 이미 경주에서 퇴각을 하고 있던 견훤인지라 왕건은 어쩔 수 없이 지금의 팔공산에 진을 치게 되는데 견훤의 급습을 받아 왕건은 사방의 후백제 군에게 갇히게 되고 군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한다. 이때 신숭겸은 왕건의 목숨을 구하고자 자신이 왕의 투구와 갑주를 입고 어차에 올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고, 이때 왕건은 병졸복으로 변복을 하고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신숭겸은 김락과 전의갑, 전이갑 형제와 함께 전사했으니 왕건에게는 처음 겪어보는 뼈아픈 패배였다. 

 

태조 왕건 신숭겸 역의 김형일

전투가 끝나고 왕건은 신숭겸의 왼쪽 발 밑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시신은 찾았으나 목은 이미 백제군이 가져간지라 황금으로 신숭겸의 머리를 만들어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지금 춘천에 있는 신숭겸의 묘자리는 원래 천하의 명당이라 왕건의 묘로 정해져 있던 곳인데 왕건이 이를 양보해 신숭겸에게 주었다고 전해진다. 신숭겸의 머리가 황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왕건은 그의 머리가 도굴 맞을까 봉분을 세개로 만들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신숭겸 '평산 신씨' 시조가 되다.

신숭겸은 원래 성이 없었으나 왕건에게 신씨라는 성을 하사 받으면서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용장이었던 신숭겸의 활솜씨는 놀라웠는데 어느날, 왕건과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가게 된다. 왕건이 마침 지나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들 중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를 맞춰 보라."라고 말하자 신숭겸이 활을 그자리에서 쏴서 정확히 세번째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 이야기가 바로 평산 신씨의 본관이 평산이 되는 유래이다.

 

신숭겸의 충절은 고려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인정을 받아 그 후손은 혜택을 입었다고 전한다. 우리가 잘 아는 신사임당, 임진왜란 탄금대전투에서 죽음을 맞은 신립 장군, 임진왜란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었지만 억울하게 죽음을 단한 신각,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구한말 최초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이 모두 평산 신씨의 후손이다. 
 
평산 신씨는 우리나라의 신씨 중 7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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