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이방원 보다는 내가 왕! 제2차 왕자의난 회안대군 이방간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19. 9. 2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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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 보다는 내가 왕! 제2차 왕자의난 회안대군 이방간 그는 누구인가?

조선의 역사중 아마도 가장 많이 미디어에서 다루는 역사적 비극을 뽑으라면 바로 고려말 조선초의 역사일 것이다. 많은 형제 중 자신이 왕이 되고자 동생을 죽이고 형을 제압하며 왕이된 이방원...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기틀을 세운 왕이자 세종대왕의 아버지로 그가 없었다면 세종대왕도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딱봐도 스토리가 되는 부분이리라...

 

그렇다면 태종 이방원에게 도전했다가 무참하게 패한 이방간 그는 누구일까?

 

육룡이나르샤에서 나온 <이방간>

|이방간 그는 누구인가? -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은 넷째 이방원은 다섯째 왕자이다. 

이성계의 첫째부인인 신의왕후 한씨의 8남매중 넷째로 이방간은 이미 고려때부터 벼슬을 역임하고 있던 그는 조선이 세워지고 회안대군으로 올라간다. 1398년 정안군 이방원을 도와 정도전을 죽이고 배다른 동생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 방번과 방석을 죽여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1399년 풍해도와 서북면의 병권을 쥐었으나 그 형이었던 정종이 장자가 없어 왕위 계승의 야심을 품게 된다. 그러던 중 1400년 박포의 이간에 속아 군사를 모아 이방원을 치는 제 2차 왕자의난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었던 이방원에게 간단히 제압당하고 붙잡혀 귀양을 떠나게 된다.  

 

JTBC 드라마 나의나라 속 이방간

사실 이방간은 박포의 이간질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도 됐다. 정안대군 이방원이 대세라고는 하나 자신이 이미 "동생이 형들을 무시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라는 명분으로 제1차 왕자의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넷째 형이었던 이방간이 힘을 기르며 기다렸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제2차 왕자의난을 일으킨 덕분에 이방원은 아주 좋은 명분으로 간단히 제압하고 왕위에 더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여튼 이방간은 그 아들과 함께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된다. 사실 역모죄로 극형에 쳐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이 많았지만 그 둘째형 정종과 이방원이 용서하면서 목숨은 건지게 된것이다. 이후 황해지역이 이방간이 군을 관리했던 곳이기 때문에 안산으로 이동해 식읍을 받고 매월 초1일에는 한양에 출입하는 대우도 받게 된다. 

1401년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이방간을 처벌해야한다는 상소가 빗발치지만 태종은 오히려 관용을 베풀어 한양으로 부르려한다. 하지만 신하들이 줄기차게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며 반발하여 하는수 없이 순천으로 올렸다가 왜구 때문에 익주로 그리고 다시 1410년에는 완산 그리고 지금의 전주로 올려보낸다. 1416년에도 신하들이 이방간의 처벌을 계속 외치는바 그 아들과 함께 공신직첩을 몰수 당하고 충청남도 홍성인 홍주로 이동하게 된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방간의 처벌 상소가 올라오지만 세종의 관용으로 봐주다가 마침내 141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눈을 감는다. 

회안대군 묘

기록에 따르면 제1차 왕자의난을 겪오 이방원을 죽도록 싫어했던 이성계였어도 이방원을 향한 이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어쩌면 비록 목숨은 부지하고 천명을 누리긴 했어도 평생을 죽음의 위협속에 이곳저곳을 유배되며 살았던 것은 그의 인생이 참 파란만장했다고 볼 수 있다. 여튼 회안대군 이방간은 선조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조선왕조의 족보인 선원록에 다시 복권을 요청하여 선원록에 들어갔으며 그의 사당인 숭덕사까지 지어 졌다고 하니 세월이 흘러 그 후손만큼은 다시 겨우 복권이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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