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이자 천문학자 덕보 홍대용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2. 1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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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이자 천문학자 덕보 홍대용 그는 누구인가?

성리학과 유교의 나라 조선. 그만큼 학문과 예를 중시하는 나라였기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우리 삶에 실제로 필요한 학문을 중시하는 실학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때, 실학자의 대표 인물 중 박지원과 함께 이름이 불리는 자가 있으니 바로 그가 홍대용이다. 덕보 홍대용 그는 과연 누구인가? 

 

 

|홍대용의 출생과 성장

 

홍대용은 1731년 영조 7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난다. 그는 나름 당시의 사회 고위층과 인프라가 있는 가문이었던지라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이 홍대용의 사촌동생인 홍담용의 딸, 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홍씨 부인이 홍대용의 사촌 여동생) 나름 여유있게 좋은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홍대용은 일찍부터 유교경전만 외우는 지금의 조선이 강해지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실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홍대용이 살던 조선 후기는 아무리 양반이어도 글만 익히다가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터라 관직에 나가려고 과거시험을 보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는 홍대용의 학문이 당시에도 주류였던 성리학과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대용은 이때 노론의 북학파였던 박지원, 유득공, 이덕무 등과 가깝게 지내며 실학에 대한 꿈을 키워간다.

 

천안에 있는 홍대용 과학관

|홍대용의 관직생활과 베이징 방문

 

여러번 과거에 낙방한뒤, 홍대용은 그의 인생에서 아주 큰 기회를 맞는다. 35세 때 숙부 홍억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으로 수행하게 되었고 3개월여를 북경에 묵은 것이 그것인데, 이곳에서 당시 청나라 학자들과 외국 선교사들을 만나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중국 학자들과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다양한 문물을 배우게 된다. 홍대용의 북경방문은 당시 실학자들로써도 가장 처음 있던 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홍대용은 귀국 후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담은 유모문답과 의산문답 등을 집필하였는데,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하여 우주무환론과 생명관 등 홍대용의 사상이 담겨져 있는 책이었다. 

 

이렇게 북경에 다녀온 홍대용은 1774년 영조 50년에 겨우 음서제에 세손익사시직을 시작으로 외직을 돌며 늦은나이에 벼슬생활을 시작한다. 사실 홍대용의 관직생활은 그리 큰 특징은 없다. 다만 1765년 중국의 북경 방문을 통해 서양 과학을 받아들이며 우리나라의 과학적 지식을 높이고 실학자들과 교류하며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이해조차 하기 힘든 학문을 알린 것이 홍대용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겠다. 

 

혼천의

|홍대용의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홍대용은 지전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지구는 둥글며 스스로 회전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때 지전설은 지구설과 지전설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1. 지구설 : 기존 주자학에서 알려진 천원지방설을 새롭게 해설한 것이다. 천원지방의 방을 모나지 않고 질서가 있다라고 해석하였으며 이를 통해 지구의 중심은 없고, 어디든지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다시 말해 당시 모든 양반들이 생각하고 있던 중국이 지구의 중심(화이사상)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이것을 사상으로도 연결시켜 모든 민족은 평등하고 그렇기에 중국은 중심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며 당시 양반들이 빠져있던 중국이 중심이라는 사상을 전면 비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2. 지전설 : 지전설 역시 우주는 무한하기에 지구가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 지구가 중심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게 한 말로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 생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를 통해 홍대용은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 우월한 것이 아니며,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생명론을 만들었고 당시 조선의 사회 계급과 차별을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의 균등화와 재능과 학식에 맞춰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당시 조선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또 생각할 수조차 없는 깨어 있는 주장을 많이 한 인물이다. 

 

|홍대용이 남긴 것들

 

홍대용은 북경을 다녀 온 후, 천문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조선에 오자마자 혼천의와 같은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농수각이라는 관측소에 보관한다. 여기에 서양의 과학과 천문에 대한 지식은 곧 수학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구구단을 담은 주해수용이라는 책을 집필한다.

 

여기에 수학 전반의 지식을 담았고, 원주율까지 구하면서 측량법에까지 집필하니 그야말로 당시 조선 사회의 수준에서는 놀랄 만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한 의산문답이나 유모문답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홍대용은 서양 음악에도 관심이 있어 양금을 국내에 소개 하기도 했고, 선글라스(오수경)를 착용하는 등 당시 사람들이 보는 신문물의 소유자였다.

 


홍대용이 주장한 많은 사상들은 분명 오늘날에 당연시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다소 꽉 막힌 사회였던 조선 후기의 모습에서는 놀랄 만한 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홍대용의 사상속에서는 근대 서양과학과 동양의 도교 사상 등이 맞물리며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아마 홍대용 같은 사람이 조선 후기의 주요 관리들이나 지식인들이었다면, 조선이 망하는 일은 없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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