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태후이자 세종의 어머니이지만 비극적이었던 삶, 원경왕후 민씨 그녀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0. 12. 2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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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이자 세종의 어머니이지만 비극적이었던 삶, 원경왕후 민씨 그녀는 누구인가? 

태종 이방원의 부인이자 그를 옆에서 독려하며 왕자의 난을 일으키도록 한 부인 원경왕후 민씨, 그러나 그녀의 삶은 뜻하지 않게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왕위에 오른 남편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으로 칭송 받는 세종대왕의 어머니임에도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그녀의 삶, 원경왕후 민씨 그녀는 누구였을까?

 

대왕세종의 원경왕후 

|원경왕후 1차 왕자의 난을 돕다!

 

원경왕후의 본관은 여흥 민씨로 이방원의 스승이었던 민제의 둘째 딸이다. 그녀가 18살이었던 1382년 그녀보다 2살 어린 16살의 이방원과 결혼하고 그 후 10년 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방원은 정안군 그리고 그녀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그녀는 바로 이 시기부터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의 절대신임을 받고 있던 정도전이 이방원의 배다른 어머니었던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추천하고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배다른 형제였던 이방원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특히 정도전은 향후 왕권을 위협하게 될 형제들의 사병을 혁파한다는 명분으로 왕자들의 무장해제를 시키고 왕자들의 권력을 모두 회수하려 하자, 원경왕후 민씨는 직접적으로 이방원의 왕자의난을 돕게 된다.

 

먼저 이방원은 정도전의 압박으로 인해 자신 소유의 무기들을 다 불태워 버렸는데 이때 원경왕후 민씨가 남편도 모르게  숨겨두었던 무기들을 왕자의 난 당일 꺼내놓았고, 또 이방원의 심복이었던 자신의 동생들 민무질, 민무구를 통해 정도전의 사람이었던 이무를 매수해 정도전의 동선까지 파악한 후 전해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원경왕후 민씨는 병이났던 태조 곁에서 왕자들과 함께 있던 이방원을 복통이 났다며 불러내어 정도전과 남은을 기습하게 하니 1차 왕자의난의 숨은 히로인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 원경왕후

|원경왕후 2차 왕자의 난에서도 나서다!

 

2차 왕자의난은 이방원의 바로 윗 형이었던 넷째 이방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방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하자
이방간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데 이때, 이방원은 왕자의난 1차와는 달리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과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자신의 윗형을 쳐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그러나 이때 원경왕후 민씨는 주저하는 이방원에게 갑옷을 입히고 명분을 말해주는 등 이방간을 먼저 쳐서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원경왕후가 이방원이 싸우게 한 모든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분명 그 시대 여성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발언임은 틀림 없다.

 

여튼 이렇게 이방원은 자신의 넷째 이방간마저 이기고 조선의 3대 왕 태종에 오르게 된다. 

 

드디어 왕후자리에 오르게 된 원경왕후, 그녀는 행복했을까?

정도전의 원경왕후

|원경왕후 민씨, 그녀의 가문 멸문지화에 이르게 되다

 

왕이 된 이방원은 이제 자신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권력욕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특히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이자 자신의 심복이었던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주의깊게 보고 있던 차였다. 특히 자신의 첫째 아들인 양녕과도 두 형제는 친했기 때문에 외척 세력이 곧 화근이 될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은 곧 터진다. 1406년 태종이 양위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철회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때 민무구, 민무질이 누구보다 좋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이방원은 이들을 제주도에 유배 보내고 1410년 사사시켰다. 두 아들의 아버지이자 원경왕후 민씨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민제는 두 아들의 유배 소식에 마음 아파하다 죽게 된다. 순식간에 왕비의 가문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동생이었던 민무휼, 민무회 역시 1416년, 양녕대군에게 자신의 가문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가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뿐인가 얼마 안가 원경왕후민씨가 태종의 후궁 효빈김씨와 경녕군을 학대한다는 소문이 나자 원경왕후 민씨를 폐위시키는 대신 유배 가있던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교살시킨다. 

 

이를 모두 지켜 본 원경왕후 어머니 송씨 역시, 자신의 아들들이 왕인 사위에게 모두 죽는 것을 보고 마음아파하다 죽고 만다. 순식간에 원경왕후 민씨 자신의 집안이 박살이 난것이다.

 

|원경왕후 민씨, 투기가 심했다?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가문이 박살남과 동시에 태종과도 자주 싸웟다고 한다. 특히 태종 이방원의 여자문제가 화근이었다. 물론 당시의 왕이 후궁을 많이 두는 것이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원경왕후는 달랐다. 끝없이 부부싸움이 일어났고, 심지어 태종은 폐비까지 만들려 했으나 모든 신하들이 말려 참은 적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 재미있는 것은 태종이 후궁인 숙의를 간택 하려 하자 원경왕후 민씨가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여 태종의 형이었던 정종이 "자신은 서자밖에 없어도 내 아내와 사는데 너는 왜그러냐?"라고 문책할 정도였다고 하니 원경왕후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원경왕후와 태종 이방원의 사이가 안좋았다는 것에 대한 반론도 있다. 원경왕후가 지금도 낳기 힘든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세명의 자식을 더 낳았기 때문인데, 과연 사이가 안좋았으면 자식을 낳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반론이 그것이다. 

 

여튼 분명한 것은 원경왕후는 당시에는 할 수 없었던 이방원의 여자 관계에 분노했고 자주 부부싸움으로 궁이 시끄러웟다는 것만큼은 기록에 남아 있는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원경왕후 민씨, 양녕대군의 폐위 그리고 죽음

 

원경왕후 민씨의 슬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418년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 셋째 충녕대군 이 세자가 되었을 때, 태종은 양녕대군을 도성과 먼 곳에 떠나보내려 한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눈물을 흘리면 만류했고, 경기도 광주로 양녕대군이 떠나게 된다. 자신이 궁에 들어오기전부터 키워왔던 장자 양녕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충녕 이상이었기에, 누구보다도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충녕대군이 드디어 왕위에 올라 세종이 되니 원경왕후는 한많던 왕후자리에서 물러나 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약 2년 후인 1420년 지금의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 태종은 세종에게 12일만 상복을 입으라 말했지만 세종은 이를 거부하고 원경왕후가 묻히는 그날까지 쭉 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2년 후 태종 이방원이 세상을 떠나자 둘은 함께 지금의 서울 서초구 헌릉에 묻혔다. 

 

레이디퍼스트가 되었지만 자신의 가문이 멸문지화, 그리고 장자의 폐위까지 씁쓸하게 겪었던 한 많은 여인이 바로 원경왕후 민씨의 삶이었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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