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이야기 소현세자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2. 11. 1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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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고 비극적인 이야기 소현세자 그는 누구인가?

 

조선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이고 치욕적이었던 사건 병자호란... 그리고 그 속에 청나라 볼모로 끌려가야 했던 비극적인 두 형제가 있다.. 소현세자, 그들은 누구일까?

 

2014/08/29 - [세계사] - 정묘호란 병자호란 청나라 태종 홍타시

 

|소현세자 봉림대군 출생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의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는 1612년 생으로 1623년 인조반정 당시 12살이었고 1625년 14살때 왕세자로 책봉된다.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은 후에 조선제 17대 왕 효종이 되는 인물로 1619년 생으로 인조반정 당시 4살이었으며 두 왕자 모두 인렬왕후의 소생이다. 

 

이후 소현세자는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주로 내려가 혼인을 했으나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으나 다음해 인조와 같이 나와 항복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이후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 봉림대군 등의 왕자들 역시 청나라 인질로 잡아가겠다는 내용을 화의 조건에 담게 되고 조선 역사상 왕자를 볼모로 내줄 치욕 스러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드라마 <삼총사>에서 소현세자와 강빈..
|소현세자 청나라로 끌려가다
삼전도의 항복 5일 후 소현세자는 마침내 청나라로 가게 되었고 아버지 인조에게 하직 인사를 궁을 찾았다. 그러자 배웅에 참여한 신하들은 소현세자를 향해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한다. 
 
사실 화친 조약 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왕자들의 볼모 문제였고 이 때문에 끝까지 항복을 하지말고 싸우자는 강화파들이 많았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종사를 지키는데 있어서 자신의 안위보다는 일의 급박함을 알고 청 진영에 나가가 스스로 볼모로 가길 청했다.
 
이렇게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는 청 태조의 14번째 아들인 구왕과 함께 청나라를 향해 길을 떠난다. 이때 소현세자의 나이 스물여섯 봉림대군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끌려왔던 심양관. 
지금은 아동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출처 오마이뉴스

 

|소현세자 청나라 생활

수많은 조선 백성들과 남이웅, 박황, 박노, 이명웅, 민응협 등의 신하들과 함께 청나라에 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에 자리를 잡고 한 숙소에 머물렀는데 이곳이 바로 심양관이었다. 특히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청과 조선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앞장서고 외교를 해나갔는데 어떻게 보면 심양관은 지금의 대사관이라 할 수 있었고 소현세자는 볼모가 아닌 주청 대사였으리라..


특히 소현세자가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자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과의 일을 해결해 나갔으며 인조 역시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준 꼴도 보기 싫은 청나라와의 일을 소현세자에게 맡겨 풀어나가도록 했다.  또한 그 어떤 청나라의 신하나 왕족이 와도 절대 기죽지 않고 조선 세자로서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에서도 소현세자의 인품을 크게 봤다.

 

이렇게 볼모임에도 볼모가 아닌 것처럼 청나라에서 생활하던 소현세자에게 눈에 띈 것은 다름아닌 청나라의 선진문물이었으며 이는 당시 조선 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성리학이 아닌 실질적인 학문과 현실을 직시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청에 온지 7년째 되던 1644년 자신이 볼모로 청나라에 올때 함께 했던 청나라 왕자 구왕과 함께 남정하여 명나라의 마지막 멸망을 보았고 조산이 이제까지 해왔던 망해가는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얼마나 잘 못 되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나온 소현세자

|소현세자 아버지 인조의 미움을 받다.

 

잠깐 다시 과거로 돌아가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끌려온지 3년째 되던 해 인조의 병환이 심각하니 세자를 일시 귀국시켜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또한 이때 조선에서는 소현세자를 불러오고 인조의 세번째 아들 인평대군을 청나라에 보내자는 요청이 있었는데 이때 청 태종 역시 오랜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소현세자를 위해 송별연을 열어주었다. 또한 이때 왕이 입는 대홍망룡의를 소현세자에게 전해주었는데 소현세자는 이는 군왕이 입는 옷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소식은 조선에 있던 인조의 귓속에 들어가게 되고 인조는 자신을 밀어내고 소현세자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지 않을까 걱정되어 소현세자에 대한 마음이 싹 굳어버린다. 


때문에 이때 소현세자가 인조를 보러 궁을 찾아왔을때도 인조는 모든 의식을 폐하였으며 반기지 않다가 소현세자가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의심을 거두고 소현세자 부부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청나라로 돌아간 이후에도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으며 이후 세자빈 강씨의 아버지가 죽어 세자빈이 조선에 왔을때도 인조는 곡을 하지 못하게 하는 등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또한 조선내에서 소현세자의 추대 이야기와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하자 자신의 부덕함으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에 대한 미안함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소현세자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소현세자가 아담샬을 만났던 북경의 남천주당

 

|소현세자 신부 아담샬을 만나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소현세자가 명나라의 몰락을 똑똑히 지켜본 후 북경으로 향한 세자는 청나라 황제를 따라 북경에 70일간을 머물었는데 이때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 인물은 바로 예수회 선교사로 청나라에 와 있던 아담샬로써 해박한 과학지식은 물론 대포와 역서를 제작하는 일을 맡고 있어 명나라의 신종에게 아주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하자 청나라 황제는 아담샬을 천문대장으로 삼고 그의 지식을 이용하여 선진문물을 받아드리고자 힘썼다.


소현세자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담셀을  만나며 당시 첨단기술들에 눈을 뜨게 되었고 우정을 쌓아가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또 아담셀을 통하여 여러 과학 서적과 지구의,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았으며 자신이 조선에 돌아가 왕위에 오른다면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꼭 도입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아담셀에게 전하기도 한다.


이때가 일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던 서양문물 수입기인 메이지유신보다도 211뇬 앞선 순간이었으니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경의 천단에서 청 세조가 황제 등극을 선언했고 이와 더불어 소현세자의 조선 귀국을 허락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현세자의 묘 소경원.. 경기도 고양에 위치해 있다. 출처- 오마이뉴스

 

|소현세자 비운의 죽음.

 

드디어 소현세자가 조선에 돌아오는 순간이 왔다. 볼모생활 년만의 귀국이었고 이는 일시적인 귀국이 아니라 평생을 자신의 고국에서 살 수 있는 자신이 그토록 바랬던 귀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현세자의 기쁨과는 달리 인조는 이미 소현세자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숙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1645년, 인조 23년 이제 30대 중반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수많은 서양 물품을 챙겨 귀국길에 올랐고 조선을 서양의 우수문물을 받아드린 최고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를 본 인조는 달랐다. 인조는 신하들의 진하를 막고 세자가 가져온 서양문물을 트집잡아 이미 자신에게 치욕을 안긴 청나라의 앞잡이로 세자를 보기 시작한다. 이후 인조는 세자를 냉대하고 분노를 표출하였고 벼루를 집어 던지는 등 감시하고 박대했다.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인조의 이러한 행동에 몸이 약해진 소현세자가 죽었다고 전해지나 더 신빙성이 있는 주장으로는 소현세자가 인조와 총애를 받던 소용조씨가 의원 이형익을 통해 독살 했다는 주장이 있다. 세자가 죽고 난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왔으며 시체가 빨리 부패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또한 인조는 의원 이형익을 오히려 옹호하면서 지켜줬다는 기록도 있으니 인조가 얼마나 한심한 왕인지 알 수 있으며 소현세자의 제사에도 모든 일정을 단축하고 간소화 하는 찌질함을 끝까지 보여주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죽음이었고 조선의 부국강병의 기회를 막은 한심한 왕 인조라는 인물을 증오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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