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전략가? 선거판의 여우, 킹메이커의 모티브 엄창록 그는 누구인가?선거전략가? 선거판의 여우, 킹메이커의 모티브 엄창록 그는 누구인가?

Posted at 2022. 1. 17. 21:43 | Posted in 국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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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전략가? 선거판의 여우, 킹메이커의 모티브 엄창록 그는 누구인가?

대선과 곧 이어질 지방선거의 해가 밝으면서 연일 각 후보들의 선거 전략에 대한 분석과 기막힌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야말로 표를 놓고 벌이는 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우리나라 선거판의 귀재이자 여우라 불렸던 인물이 있다.

 

여우 같은 선거 전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엄창록...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영화 킹메이커의 모티브가 된 인물 엄창록에 대하여 알아보자   

 

|엄창록, 김대중의 선거 참모가 되다

엄창록은 함경북도 출생으로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심리전을 맡은 북한 하사관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우익으로 전향을 한 엄창록은 강원도 인제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다가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한 김대중을 당선시키며 김대중의 비서로서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강원도 인제하고는 하등 인연이 없던 김대중을 출마 시킨게 엄창록이라는 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 된 김대중은 이후 2년뒤 벌어진 1963년의 총선에서도 재선이 되는데 이때도 엄창록이 큰 역할을 했다. 


이후 1967년 총선이었던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김대중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엄청난 지원을 받은 김병삼을 이기고 다시 한 번 국회의원을 달게 된다. 이때 박정희 정권은 야당의 대세가 되어버린 김대중이 눈엣가시였던지라 관권, 금권 선거 등 모든 불법전략을 구사하며 어마어마한 선거 지원을 했음에도 엄창록의 기가막힌 선거전략을 바탕으로 김대중은 선거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때 엄창록의 선거전략은 다음과 같다. 

 

엄창록은 상대방의 표를 빼앗는 감표작전을 최우선하며 진행했다. 

1. 선거원들을 공화당원으로 위장시켜 설탕봉투를 전달 한 후 다시 빼앗아가기
2. 공화당원으로 위장해 양담배를 건네며 태도 불량한 모습 보이기 
3. 공화당원으로 아주 소액이 든 돈봉투를 건네며 유세 떨기
4. 공화당원이라 밝히고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단체들을 불러 놓고, 예약도 잡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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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선 신민당의 대선 후보로 김대중을 올려 놓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정희를 견제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신민당의 김영삼이 유력 주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신민당 경선에서 엄창록은 김대중을 신민당의 대선 주자로 만드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된다.

 

엄창록의 선거 전략은 상대방의 표를 빼앗아 오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네거티브 작전에 주력했다. 엄창록은 김영삼과의 신민당 경선에서 김대중으로 하여금 말단 대의원들을 포섭하는 전략을 쓰는데, 당시 선거 상식으로는 신민당 내부의 표를 얻기 위해서는 지구당위원장을 포섭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되었던 때라 상당히 파격적인 전략이었다. 

엄창록은 최초로 점조직을 만들어 선거에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점조직들이 활동하며 김영삼의 텃밭이었던 영남의 대의원들까지 포섭하게끔 역할을 해냈다. 이 같은 엄창록의 활약으로 박정희를 대적할 신민당의 대선 후보로 김대중이 오를 수 있었다. 

 

|1971년 대선 중 김대중을 떠나 박정희에게 가다

1971년 대선, 김대중의 바람이 불며 박정희를 위협하던 도 중 대선 열흘을 앞두고 엄창록이 김대중을 떠난다. 김대중 자택에서 폭발물이 터지는데 이를 엄창록이 벌인 자작극이라며 당시 중앙정보부가 몰아갔고 가족까지 조사하는 협박성 짙은 조사 끝에 엄창록은 어쩔 수 없이 김대중을 떠나 실종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박정희가 당시 인구로 압도적인 경상도를 텃밭삼아 호남과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지역감정 선거를 실시하기 시작한다.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영남에 빼앗긴 대통령 호남인이 찾아오자'라는 전단지들이 영남지역으로 대규모 살포가 되고, 이를 본 영남인들은 지역감정에 매몰되어 박정희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한다. 실제 1971년 대선은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 이용된 선거로 잘 알려져 있다. 

선거는 결국 90만표라는 작은 표 차이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다시 한 번 당선이 되었는데, 이때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이 같은 지역감정을 부추긴 전략이 엄창록의 작품이라고 강하게 의심했다. 물론 지역감정을 부추긴 것이 확실치는 않으나

그 동안의 엄창록의 행적과 선거전략 등을 볼 때 충분히 의심살만한 일이었다. 물론 엄창록은 이를 부인 했다고 전해진다. 

 

여튼 1971년 대선을 기점으로 엄창록은 김대중이나 동교동계를 만나지 않고 피해다녔다고 전해진다.

 

엄창록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킹메이커>

|노태우 엄창록에게 선거 전략을 부탁하다 - 엄창록의 죽음

1971년 이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엄창록에게 1987년 노태우가 선거를 앞두고 엄창록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엄창록은 김대중, 김영삼이 모두 나왔다면서 그러니 노태우가 당연히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선거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987년 12월 대선은 노태우의 승리였고, 엄창록은 대선 직후 1988년 호흡기 질환으로 인해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엄창록의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선거사에 분명 한획을 그은 인물로 마타도어의 귀재, 선거판의 여우로 불렸으며 김대중의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까웠던 인물'로 평가하였고 박정희는 그의 선거보고서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등 대단했던 인물이다. 

 

이번에 개봉할 영화 <킹메이커>에서 그의 활약을 모티브로 삼아 재구성하였다고 하니 선거가 줄지어 있는 올해를 생각하며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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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을 정벌한 고구려 초기 명장 부분노 그는 누구인가?선비족을 정벌한 고구려 초기 명장 부분노 그는 누구인가?

Posted at 2022. 1. 3. 23:21 | Posted in 국사/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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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을 정벌한 고구려 초기 명장 부분노 그는 누구인가?

드라마 <주몽>에서 나오듯 주몽은 그 자신의 뛰어남도 있지만 그를 따르는 부하들의 능력이 상당히 출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부분노는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고 선비족을 격퇴하여 고구려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힘을 보탠 명장으로 나온다. 부분노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드라마 <주몽> 부분노

|부분노 역사에 등장하다 - 동명성왕(주몽)

부분노가 태어난 곳과 출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초기 삼국의 역사를 기록했던 구삼국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부분노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주몽)때부터 그 아들 유리왕때까지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분노가 처음 고구려에서 공을 세운 대목은 이러하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주몽)이 1년후, 비류국(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 위치한 작은나라)을 치게 된다.

 

이때 비류국을 다스리던 송양과 주몽이 활쏘기를 하였고 주몽이 압도적으로 이겼는데 송양이 역사가 짧은 고구려를 업신 여기자 동명성왕이 고구려가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고각(의식을 사용할 때 쓰는 옛날 북), 위의(위엄과 예법)이 없어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부분노는 비류국에 몰래 잠입하여 고각을 가져오겠다고 말한 후, 고각을 훔쳐 고구려로 돌아온다. 이에 송양이 항의하지만 동명성왕이 고각에 색칠을 다시하여 증거를 없애니 송양이 할말이 없었고 곧이어 나라를 들어바친다. 비류국 정벌은 첩보와 지략이 능한 장수였던 부분노가 역사에 첫 이름을 올린 순간이자 고구려의 명장이 된 계기가 되었다. 

 

부분노는 동명성왕이 처음 개국을 했을때부터 그 공을 세운 인물이나 이름에서 노(종 노,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그리 높지 않은 상태였으며 고구려의 개국공신이자 동명성왕의 최측근인 오이, 마리, 협보와는 다른 대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분노는 오이와 함께 행인국(태백산 동남쪽에 위치한 나라 태백산은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볼 때 행인국은 개마고원 일대에 위치해 있던 나라로 보임)을 정벌하는데도 공을 세운다. 

|부분노 선비족을 정벌하다 - 유리왕

부분노가 역사에 완벽히 이름을 남기고 고구려의 기틀을 마련한 장수라고 표현되는 것은 바로 기원전 9년(유리명왕 11년)에 벌어진 선비족 공략이었다. 선비족은 몽골 또는 튀르트계의 민족으로 유목과 목축을 주로 하는 민족이었는데 당시 고구려를 곧 잘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고 빠른 기동력을 앞세워 자신의 땅으로 도망가는 행태를 벌이고 있었다.

이에 유리왕이 고민에 빠졌고, 누구든 선비족을 정벌하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한다. 이때 부분노가 나서 선비족은 꾀로써 무너트려야 한다며 계책을 유리명왕에게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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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 정벌을 위한 부분노의 계책

부분노의 계책은 다음과 같다.

 

"거짓으로 간첩을 만들어 선비족에게 보내 거짓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고구려는 작고, 군대가 약해 겁이나 움직이지 못한다'라고 말하면 선비족은 방심하고 수비를 제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제가 몰래 군사를 이끌고 가 숲속에 숨어서 선비족의 성을 빼앗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이때 왕께서 군사를 이끌고 선비족의 성 남쪽에 진을 치다가 도망치는 척 하면 선비족은 이에 속아 기쁘게 쫒을 것입니다. 이때 제가 군사를 이끌고 성을 접수한 후 왕께서도 뒤를 돌아 양쪽에서 선비족을 공격하면 선비족은 무너질 것ㅇ비니다. "

 

즉 거짓으로 선비족을 속인 후 여기에 유인책은 물론 매복까지 모든 전략의 총집합이었던 것이다. 이 계책만 봐도 얼마나 부분노가 치밀하고 지략이 있는 장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선비족 정벌에 쓴 계책은 이후 서기 5세기나 되어야 나오는 병법서 삼십육계의 주요한 전략들을 한데 모은 것으로써 부분노의 전략은 대단한 것이었다. 

 

한편, 유리명왕은 부분노의 이 계책을 받아들여 선비족 공격에 나서게 된다. 

|선비족 정벌의 결과 

선비족은 이미 부분노가 보낸 간첩의 반간계에 속아 방심을 하고 있었다. 이에 유리왕이 선비족의 성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퇴각을 하였고 선비족은 자신의 성문을 열고 유리왕을 쫒기 시작한다.

 

이에 부분노가 텅 빈 선비족의 성을 빼앗았는데, 성이 떨어진 것을 본 선비족이 황급히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유리왕이 선비족의 뒤를 쳐 박살을 낸다. 이에 선비족은 항복을 하고 고구려에게 병합된다.

 

이 같은 공을 세운 부분노에게 유리왕은 기뻐 부분노가 정벌한 땅을 식읍으로 주려 하였는데 부분노는 이를 사양하였고 유리왕의 덕이라고 치켜세운다. 유리왕은 이에 황금 30근을 비롯해 좋은 말 열필을 부분노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지배층의 경제기반을 볼 수 있는 것이라 의미가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으며, 부분노의 성품까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부분노는 태어난것과 마찬가지로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이 같은 부분노의 큰 활약은 기록이 되어 있으며 당시 초기 고구려의 정복사업에 더 없이 필요한 큰 공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멋진 계책을 세운 부분노 그는 분명 고구려의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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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독살을 당했다? 정조의 죽음과 독살설에 대한 증거와 아쉬움정조는 독살을 당했다? 정조의 죽음과 독살설에 대한 증거와 아쉬움

Posted at 2021. 12. 29. 23:14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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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독살을 당했다? 정조의 죽음과 독살설에 대한 증거와 아쉬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세손 시절부터 목숨에 위협을 끊임없이 느껴야 했던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암살시도를 비롯하여 많은 위험을 겪어야 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성군이라 불리는 개혁군주 정조의 치세가 계속 됨에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한은 수원 화성을 비롯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시도하게 하여 영조대부터 권세를 유지하려는 일부 권신들과 영조의 아내이자 정조의 할머니뻘인 정순왕후 김씨 등에게는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조는 재위 24년만에 갑자기 죽게되는데, 그로인해 정조가 독살을 당했다는 독살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홧병이 있었던 정조       

정조가 승하한 1800년은 정조 재위 24년이었고 나이는 49살이었다. 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6월 14일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정조에게 종기가 났는데 이때 내의원을 불러 말하길 '두통이 많이 있고 등쪽에서 열이 올라왔으며 이는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하고 자기마저 죽이려 했던 노론을 왕이 되어서도 없애지 못하고 정사를 논하고 있으니 홧병이 정조를 평생 괴롭혔던 것이다. 

|연훈방 처방 - 6월 25일 (치료 11일 ∼ 12일차)

처음 종기로 진찰을 받은 6월 14일 이후 다양한 약을 써보며 병세가 나았다 심각해지기를 반복한 후 6월 25일 수은을 주성분으로 하는 민간요법인 연훈방을 처방 받는다. 이 연훈방 요법은 정조가 죽은 뒤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데 연훈방을 건의한 심인이 노론 강경파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록에 의하면 정조에게 연훈방은 2~3회밖에 사용되지 않았을뿐더러 수은에 중독되면 으레 보이는 호흡곤란 같은 증상이 기록에 없었기에 연훈방만으로는 정조의 독살설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은 맞지만 정조의 치료에 노론 강경파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을 가능하게 할만하다. 

정조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출처: 경기도청)

|정조의 정신이 혼미해지다 - 6월 26일 (치료 13일 ~ 승하 하루 전)

연훈방을 사용한 후 정조가 잠에 들었을 때 피고름이 터져 정조의 잠자리에 번질 정도였다고 하니 정조와 신하들은 병세에 차도가 있다며 기뻐했다. 

 

이후 6월 26일 경옥고 처방이 되는데, 이때 경옥고를 강권한 것은 노론 강경파 이시수였다. 경옥고는 인삼이 들어가는 것으로 정조의 경우 홧병이 있어 몸이 뜨겁고 어릴때부터 유독 열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인삼이 들어가는 약을 싫어했다. 때문에 정조는 경옥고를 거부했다가 연훈방 처방 이후 몸이 좋아진 것 같자 또 다시 이시수가 경옥고를 권하였고 이를 정조가 받아들여 먹게 된다. 

 

그러나 이후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고 6월 27일,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정사를 챙겼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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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승하 - 6월 28일, 정순왕후 김씨가 있었다. 

 정조가 승하하는 6월 28일, 정조의 병세는 위독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정순왕후 김씨다. 정순왕후 김씨는 이시수가 '인삼차에 청신환을 개어서 끓인 것'을 정조가 먹지 못한다고 말하자 본인이 직접 받들어 올린다며 모든 신하들을 물러보낸다. 

 

이후 대전에 정순왕후 김씨만 들어간 이후 얼마 후, 정조는 승하한다. 때문에 정조실록에 정조의 임종 장면과 시간은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지 않고 '이날 유시(오후 5~7시)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는 다소 두루뭉실한 기록만 남아 있다. 

|정조 독살설 증거 1. 정순왕후 김씨와 노론의 부활

정순왕후 김씨는 세손인 정조와 사이가 좋은 인물이 아니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15살의 나이로 66살의 영조와 혼인한 뒤 자신의 가문인 경주김씨 세력과 함께 사도세자 제거에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뒤 김씨의 동생 김귀주를 유배보냈는데 그는 10년 후 귀양지에서 병사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집안에 정조가 원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정조가 죽으면 정조의 아들인 11살 순조를 대신하여 자신이 섭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런 정순왕후가 정조를 살리기 위해 본인이 직접 약을 먹이겠다며 정조의 임종장면을 혼자 봤다는 부분은 분명 독살설을 제기할만한 합리적인 의심을 가능케 한다. 

 

실제로 정조가 죽은 후 정순왕후 김씨는 자신의 죽은 동생 김귀주를 이조판서로 추증하였고 살아있는 자신의 일족을 다시 불러드렸다. 이는 또한 당시 정조의 눈치를 보고 있던 노론의 부활을 알리는 결과를 낳았다. 

|정조 독살설 증거 2. 정조가 바랬던 남인의 몰락

정조가 병으로 몸져 눕기 약 20여일 전, 그러니까 1800년 5월 30일, 연석에서 정조는 100년을 집권해 오며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까지 손을 댄 노론 벽파에 대한 마지막 경고를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시대 상황에 따라 의리가 달라지는 점과 인물을 등용하는 문제를 말하게 되는데 쉽게 말해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관여했던 모든 인물들에게 용서를 빌라는 말을 하는 한 편, 자신이 키워왔던 친 정조파였던 남인(체제공, 정약용, 이가환 등)을 재상에 임명하겠다는 말이었다. 

이를 오희연교라고 하는데, 노론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절망에 빠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오희연교는 앞서말한 것처럼 정조가 갑자기 죽으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또한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 김씨의 세상이 되자 노론강경파와 함께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유배 보내게 된다. 명분은 사학을 잡겠다는 명분이었으나 정조가 키워온 남인들을 축출하는데 이를 활용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정조의 죽음은 분명 정조의 꿈을 접게 하고 100여년의 조선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노론의 치세를 이어가게끔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의심을 가능하게 한다.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알린 김조순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쉬운점 

정조 시대는 농업과 상업의 발달에 의한 신분제 해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고 세계적으로는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은 그야말로 혁신과 개혁의 파도가 들이치고 있었다. 정조는 이러한 사회의 흐름을 받아드리며 사회체제의 개혁을 수용하려한 왕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소수의 지배층 노론벽파가 다시 한 번 실권을 휘어잡으며 폐쇄된 조선을 만들어냈고 정조의 모든 개혁정책과 인재발굴은 물거품이 되었다. 

 

여기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마저 시작되며 조선은 극단적인 수구체제로 접어들게 된다. 다시 말해 세계의 흐름과 정반대되는 암울한 선택의 연속을 조선이 하게된 것이다. 이는 곧 조선을 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더 나아가 일제치하에 접어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정조가 살아 있었다면, 최소 10년을 더 이끌고 갔더라면, 그 아들 순조가 장성했을 때 왕위를 물려 받았을까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정조의 독살설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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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복형에게 목숨을 잃은 조선 최초의 세자 의안대군 이방석자신의 이복형에게 목숨을 잃은 조선 최초의 세자 의안대군 이방석

Posted at 2021. 12. 25. 23:27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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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복형에게 목숨을 잃은 조선 최초의 세자 의안대군 이방석 

이성계를 통해 조선이 세워진 이후, 이성계 자식들은 물론 신하들 사이에서 그 후계에 대한 치열한 정치 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무수한 예상을 깨고 조선 최초의 왕세자에 지명된 것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방석이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선택에 대한 댓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곧바로 형제들끼리 피튀기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방석은 누구였고 왜 무수한 형들을 내치고 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드라마 정도전 이방석

 |이방석의 출생과 서열

이방석은 조선이 세워지기 딱 10년전인 1382년,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으로 태어난다. 

이성계는 첫째부인 신의왕후 한씨(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죽음)에게서 우리가 잘알고 있는 이방우, 이방과(정종),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다섯째) 다섯명의 아들을 얻었고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으로 이방번, 이방석을 얻었다. 즉 이방석은 아무리 잘해도 왕위와는 거리가 먼 순서였다. 

|이방석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나? 

출생의 서열과 나이, 그리고 조선이 세워지는 가운데서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불철주야 목숨바쳐 노력했던 자신의 형들을 제치고 어떻게 이방석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딱 두가지이다. 

 

육룡이나르샤 이방석

첫 째, 조선 초 신권과 왕권의 가치관 대립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신권(신하의 권리)이 왕권(왕의 권리)을 이긴다는 것은 곧, 역모를 의미했지만 조선 초 사회는 달랐다.

 

신권주의를 외쳤던 인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설계자이자 이성계의 책사 역할을 한 삼봉 정도전이었는데 그는 조선을 세우면서 이제까지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볼 수 없었고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새로운 차원의 국가를 만들겠다는 포부와 계획이 있었다.

 

정도전은 재상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조금의 과장을 보태면 마치 지금의 입헌군주제와 같은 정치구조를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다 이성계는 정도전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정도전의 판단에 대해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정도전이 구상한 계획은 하나 둘 이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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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바로 이방원의 아들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이방원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왕이 모든 권력을 갖고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보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정도전으로서는 이방원을 비롯한 이성계의 아들들에 대한 견제를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둘 째, 신덕왕후 강씨의 욕망 때문이었다.

 

1392년 조선이 세워지자마자 세자 책봉에 대한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나왔고, 첫째 부인 한씨에게서 얻은 이방우(첫째), 이방원(다섯째)이 세자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이성계의 신임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들 그중에서도 이방석을 세자로 올리고자 했다. 때문에 이성계의 책사 정도전과의 협력을 우선시 했고 정도전 역시 자신이 꿈꾼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라도 다 큰 한씨의 아들보다는 아직 어리고 잘 모르는 이방석을 세자에 올리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고 판단을 내렸다.

 

더군다나 같은 강씨의 소생으로 그 형 이방번은 정도전, 조준 등에게 성질이 경솔하다고 찍혔기에 세자자리를 반대했던지라 이성계의 막내 이방석은 쟁쟁한 형들을 제칠수 있었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을 때는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였던지라 빠른 결정이 필요했고 이러한 이유로 이방석은 10살의 나이로 결국 세자자리에 오른다. 

 

|이방석, 사병혁파로 불난집에 부채질하다

1392년 8월 조선이 세워지고 1달만에 세자 자리에 오른 이방석으로 인해 이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분노를 참지 못한다. 조선을 세우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은 10살 동생이 세자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한씨 소생의 아들들을 더욱 못참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발생하는데 바로 사병 혁파였다. 아무리 조선이 세워졌다지만 고려말부터 계속되어온 개별이 거느리는 사병은 분명 왕권에 큰 부담이 되었다. 

 

특히 이성계 역시 자신의 사병인 가별초를 통해 조선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지라, 당시 왕자들이 데리고 있던 사병들은 새롭게 왕위에 오를 이방석과 정도전에게는 무서운 대상이었다.

이에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하고 중앙 정부 즉, 이방석이 모든 병권을 장악해야한다고 했다. 여기에 1396년 명나라가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트집 삼아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하라는 요구를 해왔고 이에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은 명나라와 한 판 붙기로 하면서 요동정벌론이 다시 그 고개를 들게 된다. 본인들이 요동정벌을 반대한다며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잡아놓고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이었다. 

여튼,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명분삼아 왕자들의 사병을 모두 중앙군으로 흡수하려 하였고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은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여 거사를 일으키기로 모의한다. 여기에 신덕왕후 강씨가 1396년 죽으면서 이방석의 세력이 약해진 상황이어서 조선 왕실은 피바람이 불기 직전으로 치닫게 된다.

|1차왕자의난과 이방석의 죽음

정도전이 내세운 사병혁파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은 모두 궁을 떠나야 했으며 이는 정도전이 주장하는 신권의 세상이 열림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이방원은 이를 용서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막는 장애물은 항상 무참히 박살내고 정면을 돌파한 인물이었고 대의나 명분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398년 8월 25일, 이방원은 난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난 무인정사이다. 이방원과 그 형제는 자신들의 힘을 한번에 모았고 하륜, 이숙번을 비롯해 자신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의 세력들까지 
총집결시킨다. 

 

이후 곧바로 제일 없애야 할 정도전 일파를 급습하여 모조리 척살한다. 이때 정도전은 남은, 심효생 등과 만나고 있었는데 이방원이 한번에 척살한 것이다. 이후 곧바로 이 모든 것의 화근이라 생각한 동생 이방석을 죽이러 궁궐로 쳐들어갔으며 이방석을 잡아 폐세자 시킨 후 귀양을 보내다 죽였다.

 

이때 이방석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사실 이성계는 기울어진 대세 속에서 이방석을 살려준다는 약속을 믿고 궁에서 내보냈으며 매달리는 세자빈에게도 '그래도 자신의 동생을 죽이기야 하겠느냐'라고 말하며 위로까지 해주었다고 전하는데 귀양길에 자객에게 형 이방번과 함께 죽고 만다. 

이방원이 실권을 잡은 후 곧바로 이방석은 서자로 격하 당했으며 신덕왕후 강씨 마저 거의 후궁급으로 격하시킨다. 그러다 일말의 죄책감때문인지 소도군으로 올렸다가 숙종때에 이르러 의안대군으로 추증된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이방석 묘

의안대군 묘는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을 이방석의 양자로 입적시켜 후사를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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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부터 주술까지 파란만장했던 정조 3대 역모 사건암살부터 주술까지 파란만장했던 정조 3대 역모 사건

Posted at 2021. 12. 23. 23:00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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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부터 주술까지 파란만장했던 정조 시대 3대 역모 사건

사도세자의 아들로 목숨까지 위협 당하며 힘들게 왕위에 오른 왕 정조, 하지만 그가 왕이 된지 얼마되지 않아 조선 역사상 최초로 정조를 죽이기 위한 암살단이 궁에 침투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뿐만 아니라 정조 때에는 유난히 역모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데, 암살 및 주술 사건을 포함하여 정조 시대 벌어진 3대 역모 사건을 살펴보려 한다. 

 

|첫번째 역모 : 정조 암살 시도 사건 - 정유역변

- 발단

정조는 자신이 즉위식날 모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칭했다. 정조의 이 말은 사도세자를 죽게하였고 세자 이산(정조)을 왕위에 못 앉게 하기 위해서 끊임 없이 음모를 펼쳤던 노론에게 있어서는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말이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숙청을 실시하였고 홍인한과 결탁해 자신을 견제하는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귀양보내고 화완옹주를 시녀로 강등시킨다. 이때부터 화완옹주는 정씨부인 즉, 정처라 불리게 된다. 

 

이후 홍인한을 귀양보내고 정순왕후 김씨의 오라비 김귀주도 유배보낸다. 또한 영조의 후궁 숙위 문씨의 작호를 박탈하고 사저로 내쫒고 사약을 들게 했으며 그 오라비 문성국을 사형시켰으며 그 가족을 연좌시켜 종으로 만든다. 이렇듯 정조의 피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다. 

 

실제 정조의 암살시도에 도움을 준 궁녀 월혜

- 진행

정조의 피의 복수가 시작되자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역시 살기 위해 악수를 둔다. 그 중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홍계희의 집안이 반란에 앞장선다. 홍계희는 이미 정조가 즉위하기 전에 죽긴 했지만 그의 아들들이 정조 즉위 후 숙청을 당하자 암살을 계획한 것이다. 

 

특히 홍계희의 아들 홍지해는 홍인한과 스승과 제자 사이였기에 암살 계획에 적극 뛰어든다. 홍계희의 손자이자 홍지해의 아들인 홍상범이 암살단을 궁으로 보내 정조를 죽이려 한 것인데, 이는 조선 개국이래 처음 있을만한 경악할만한 사건이었고 그 어떤 명분도 없는 말도 안되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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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범은 우선 천민 출신 장사 전흥문을 돈과 여자로 포섭해 행동책으로 삼고 궁성 호위 군관 강용휘를 포섭했으며 그의 딸 궁녀 강월혜까지 포섭하였다. 이후 칼과 철편을 들고 대궐 담을 넘어 정조가 머무는 경희궁 존현각 지붕까지 올랐으나 호위무사에게 발각되어 그대로 도주한다. 

 

도주한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달 뒤, 다시 한 번 경계가 약화된 틈을 타 궁을 넘어 정조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체포 당하며 끝이 나게 된다. 이후 이를 주모한 홍상범은 잡혀 사지가 찢겨 죽었고 풍산홍씨 가문 역시 줄줄이 엮여 목숨을 잃게 된다. 이를 정유역변이라한다.

 

 

조선왕조 최초의 궁을 침입한 자객? 정조의 암살시도 정유역변

조선왕조 최초의 궁을 침입한 자객? 정조의 암살시도 정유역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하였던 신하들은 그의 아들 세자 이산, 그러니까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yoosi0211.tistory.com

정조 역할을 맡은 김상중과 이서진

|두번째 역모 : 주술로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하다  

정조의 암살 시도에 대해 범인들이 잡히고 대대적인 조사가 들어가는 시점에 홍계희의 조카인 홍술해의 아내 효임이 주술을 이용해 정조와 홍국영을 살해하려한 사건이 일어난다. 

 

심지어 홍술해는 돈 4만냥과 조 2500석, 소나무 260그루를 도둑질했다 사형당할뻔한 것을 정조가 등급을 감해줘 유배형으로 마무리 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부인 효임이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당 점방과 함께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하여 죽이려 했던 것이었다. 

 

당시 주술은 도성의 동서남북과 가운데 우물물, 홍술해집 우물물, 홍국영집 우물물을 섞어 홍술해 집에서 섞은 후 홍술해 우물에다 쏟고, 붉은 안료로 홍국영과 정조의 얼굴을 그리고 홍국영 집 앞뒤에 묻고 화살에 얼굴그림을 얽어매고 공중에 쏘면서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퍼부은 행위였다. 

 

물론 현실에서 먹힐일은 없었지만 발각되어 모두 사형당한다. 

 

|세번째 역모 : 은전군 추대 사건

노론은 안그래도 자신들이 죽으려던 판에 역모마저 발생하자 살 궁리를 해야했다. 그러던 중 아주 좋은 기회를 만나게된다. 바로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 추대 사건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정조의 암살시도에 대한 국청이 계속되는 중에 이번에는 홍상범의 4촌 홍상길이 뜬금없이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말한다. 사도세자의 서자에는 은언군, 은전군, 은신군이 있었는데 이중 은언군은 영조때에 죽고 은전군, 은신군이 남아 있었는데 은전군을 지목한 것이다.   

노론은 이때다 싶어 은전군을 죽여야 한다며 들불같이 나서기 시작한다. 사실 홍상길의 주장 외에는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노론은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은전군의 사형을 요구했다. 

 

기록에는 영의정이 신하를 거느리고 44번이나 정조에게 찾아가 은전군의 사형을 외쳤다고 하는데 정조가 끝내 거부하자 신하들이 은전군을 끌어내 자결을 하라고 강요하는 등 몹쓸짓을 한다. 노론은 철저히 국면전환용으로 왕족의 역모죄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 같은 신하들의 간언에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은전군의 자결을 명했고 결국 16살의 나이로 은전군은 죽고 만다.  


정조의 암살부터 주술 그리고 왕족 추대 사건까지 한번에 몰려온 이 사건을 정조 3대 모역사건이라 하는데, 당시 정조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노론이 얼마나 조정을 장악했는지를 볼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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