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거북선을 처음본 왜군 장수 가토 요시아키 그는 누구인가?임진왜란 거북선을 처음본 왜군 장수 가토 요시아키 그는 누구인가?

Posted at 2022. 7. 1. 19:24 | Posted in 세계사/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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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거북선을 처음본 왜군 장수 가토 요시아키 그는 누구인가?

조선 정벌의 야욕을 품고 시작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으로 당시 히데요시의 측근 장수들이 군대를 이끌고 조선 땅을 밟았다. 그 중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처음 본 왜군 장수는 누구 였을까? 바로 안골포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처참히 패한 가토 요시아키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누구일까?

영화 한산에서 배우 김성균이 맡은 역할인 가토 요시아키

|가토 요시아키의 출생과 임진왜란 전 

1593년 6월에 태어난 가토 요시아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다가 배반을 한 아버지 가토 노리아키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졸지에 유랑신세에 놓인다. 이후 어린 나이부터 말 행상을 돕다가 가토 가게야스의 눈에 띄어 히데요시에 천거된다. 

히데요시는 요시아키를 자신의 양자였던 하시바 히데카쓰를 경호하는 역할을 맡게 한다.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요시아키는 결정적으로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 사이에서 벌어진 숙명의 대결인 시즈카타케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면서 히데요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명으로 꼽히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1.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政則)

2.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3.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또는 가토 요시아키라.

4.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5.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

6.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7.가쓰야 다케노리(糟野武則)

 

특히 수군을 이끌고 연전 연승을 했던 장수로 평가 받았다. 다시 말해 가토 요시아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가문의 아들이었다가 그 능력 하나만으로 권세를 잡게된 인물이었다.

 

특히 수군을 이끄는데 능숙했던 가토 요시아키

|가토 요시아키 임진왜란에 참전하다 

1592년 임진왜란에 수군 제 3진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수군을 이끌었던만큼 이순신 장군을 많이 만났는데 뭐 결과는 알다시피 패배의 연속이었다. 특히 안골포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 보기도 한 가토 요시아키는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이순신 장군을 이겨보지 못하고 연전연패만 거듭했다.

 

이후 1594년 명나라와 왜군의 강화교섭이 시작되며 잠시 일본으로 돌아왔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수군을 이끌고와 그해 7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시키는 공을 세운다. 이후 남원성 전투, 울산성 전투 등에서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퇴각하여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다.

 

가토 요시아키가 건설한 미쓰야마성

|임진왜란 이후 가토 요시아키의 삶과 죽음

일본에 돌아오자마자 히데요시 사후 갈라선 이시다 미쓰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황속에서 이에야스파에 속해서 전투에 참여 공을 세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최후의 전투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요시아키는 마쓰야마의 번주로 취임한 뒤 지금도 잘 알려진 마쓰야마성을 축조하다가 완성 된 것을 못보고 1631년 6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임진왜란을 다룬 미디어에서는 그리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지만 이번 영화 <한산>에서 배우 김성균이 역할을 맡은만큼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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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것 가운데 별 것 아닌 존재, 구우일모 유래와 뜻수많은 것 가운데 별 것 아닌 존재, 구우일모 유래와 뜻

Posted at 2022. 6. 26. 16:37 | Posted in 언어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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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것 가운데 별 것 아닌 존재, 구우일모 유래와 뜻

수많은 것 중에 먼지 같은 존재, 어찌보면 우주에서 나와 같은 수많은 존재중 하나를 뜻하는 구우일모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쓰는 고사성어 중 하나이다. 직역하면 9마리의 소의 털 중 하나이니 그 보잘 것 없음을 뜻하는 구우일모 그 유래와 뜻은 어떻게 될까? 

|구우일모 유래

구우일모는 9마리의 소의 털 중 하나라는 뜻으로 9마리의 소의 털 갯수만 수십만개는 넘을 것이니 그 중 하나의 털이 가진 의미는 보잘 것 없다는데서 유래한다. 즉, 다시 말해 존재가치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을 뜻할 때 쓰이는 말이다. 
 
구우일모는 아홉 구 九, 소 우 牛, 한 일 一, 터럭 모 毛로 구성되어 있다. 그 유래는 지금도 역사서 하면 가장 먼저 손꼽히는 것 중 하나인 <사기>를 쓴 사마천에게서 시작된다. 

 

우리가 잘 아는 한나라 무제 때 한나라를 괴롭히던 오랑캐 흉노는 골칫거리중 하나였다. 이에 무제는 흉노를 무찌를 군사를 일으켜 출전케 하였다. 그중 '이릉'이라는 장수는 본래 흉노를 공격하는 부대의 보급을 맡고 있었는데, 이릉 자신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흉노족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무제에게 전한다. 이에 무제는 이릉에게 5천명의 보병을 주어 흉노족의 전력을 약화하게 한다.  

 

이릉 장군

이릉은 첫 전투에서 흉노의 주력부대를 만나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흉노족이 다시 한 번 전력을 총집결하여 이릉의 군대를 공격한다. 이에 이릉은 10일 넘게 선전을 하며 항거를 했지만 곧 그와 군대는 한계에 다다른다.

 

이에 이릉은 무제를 볼 면목이 없다며 흉노에게 항복한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이릉에게 진노하였고 조정에서도 이릉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이때 이릉의 변호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릉은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운이 맞지 않아 패배했습니다. 이릉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웠고 죽지 않고 흉노에 항복한 것은 그가 후일을 도모하여 반드시 폐하께 지은 죄를 씻으려고 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이말을 들은 무제는 사마천에게마저 분노하였고, 사마천을 남자로서 가장 치욕적일 수 있는 궁형(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벌)에 처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이릉의 화' 사건이다. 사마천은 옥에 갇힌 후 자신의 친구 임안에게 심경을 밝힌 편지를 쓴다.

 

"만일 내가 죽어도 <아홉마리 소 중에서 털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개미와 같은 미물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내가 절개를 지키다 죽은 것이 아니라  지혜가 다해 나쁜말을 하다 어리석게 죽은 것으로 여길 것이네"

사마천

사마천이 이러한 치욕을 겪으면서 버틴 것은 자신의 아버지 뜻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사마천은 당시 아버지 사마담이 역사서를 쓰라고 유언을 남긴 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기>를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2년 후 중국 최초의 역사서이자 당시 동아시아 역사서의 중요한 기준점이 된 <사기>를 마침내 완성시킨다. 이는 총 130권에 다다르는 엄청난 역사서였다. 이 <사기>가 사마천이라는 존재를 구우일모 중 하나가 아닌 지금까지도 중국 역사상 위대한 역사가로써 이름을 기억하게 하고 있는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구우일모라 칭했지만 치욕을 참고 살아남아 이룬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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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과 명량 준사 실존인물? 임진왜란 항왜에 대해서 알아보자영화 한산과 명량 준사 실존인물? 임진왜란 항왜에 대해서 알아보자

Posted at 2022. 6. 13. 22:32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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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과 명량 준사 실존인물? 임진왜란 항왜에 대해서 알아보자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기적같은 승리를 토대로 만든 영화 <명량> 그리고 <한산>,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감동이 더 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승리를 이끌어낸 인물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일본인 역할의 '준사'이다. 

 

실제 전투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준사라는 일본인이 이순신 장군을 돕는 것이 사실일지 허구일지 의심이 되는데, 실제로 준사라는 인물이 존재 했을까?

 

영화 명량속 준사 역할을 맡은 '오타니 료헤이'

|준사 그는 실존인물이었을까?

 

준사가 실존인물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기록을 찾아봐야한다. 그런데 그 기록이 난중일기 명량해전을 다룬 기록에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명량대첩의 승리 이후 항복한 왜군 준사가 등장한다. 준사는 바다에 빠져 죽은 왜군들을 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 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마다시를 바다에서 건져 목을 내다거니 왜군의 사기가 꺾였다고 전한다. 여기서 준사가 지목한 마다시가 명량에서 류승룡이 맡은 역할인 '구루지마 미치후사'라는 설이 유력하다. 

 

명량에서 구루지마 역을 맡은 류승용

|준사 한산도대첩 때도 등장?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한산은 우리가 잘알고 있는 것처럼 한산도대첩을 다룬 영화다. 그런데 난중일기에서 준사를 기록하기를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한 왜군 '항왜'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안골포해전은 1592년 7월 10일로 그 이틀전 7월 8일 열린 해전 한산도대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이 맞다. 

 

물론 준사에 관한 기록은 난중일기에서 기록된 이 짧은 부분 말고는 더는 찾아볼 수 없으니 그가 투항한 왜군인 것 말고는 영화처럼 이순신 장군의 보디가드처럼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준사는 실존인물이지만 그의 행적에는 분명 영화적 상상력이 들어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준사말고도 항왜라 불리며 조선에 투항한 왜군들은 많았다

|준사 말고도 임진왜란 때 조선과 함께한 왜군들이 있었다

 

1) 김충선(사야가) : 김충선 일본 이름 사야가는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항왜이다. 사야가는 1592년 4월 15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왜군 명장 가토기요마사의 제2진 선봉으로 부산포에 상륙한다. 그러나 사야가는 왜군이 부산포를 쉽게 접수하였음에도 부하들과 조선에 투항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의롭지 못한 전쟁으로 동방예의지국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선 조정은 사야가의 뜻을 크게 생각하여 정2품 자헌대부에 제수하고 김해김씨의 성을 내렸으며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이라는 이름을 붙여 김충선이라 이름을 지었다. 특히 그의 본관인 김해김씨는 임금이 하사한 성이라 하여 '사성 김해 김씨'라고 불리게 된다. 

이후 김충선은 임진왜란에서 조총과 화포를 생산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인조때에는 이괄의 난을 막고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우는 등 조선이 가장 국난에 빠져 있을 때 그 공을 인정 받아 공신 칭호까지 얻게 된다. 

 

여여문이 활약한 울산왜성전투

2) 여여문 : 여여문은 임진왜란 때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투항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투항한 일본인을 조선이 후하게 대접한다는 말을 듣고 투항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여여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선조실록에 남아 있는데 '보통 왜인이 아니니, 대우를 후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여기에 명을 받은 훈련도감에서도  '여여문을 집중치료 하여 회복되었음에도 명령대로 더 특별히 후대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여여문은 검술이 뛰어난자였으며 일본군의 진법을 조선에 알려주는 등 큰 공을 세운다. 뿐만 아니라 여여문은 자신을 최전방으로 보내주길 조정에 간청하였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경주진공작전은 물론 왜군의 변장을 하고 정탐 임무를 수행하는 목숨을 건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여문은 1598년 1월 왜군의 정탐을 마치고 수급을 취해 명나라 진지에 들렸다가 명나라 장수의 공적 욕심에 살해당하고 만다. 그야말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는 여여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으며 당시 우의정 이덕형은 여여문에게 반드시 상급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을 올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항왜의 공로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항왜의 수는 1만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많은 기록에서 항왜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들은 왜군의 용병술의 약점을 조선군에게 알리거나 스파이 활동, 조총 생산 등 다양한 부분에서 많은 공적을 세운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항복하는 왜군들을 의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드리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특히 선조는 '항왜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할 정도로 항왜를 신임했다. 준사나 김충선 또는 여여문말고도 수많은 왜군들이 조선에 투항하여 조선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이번 영화 한산의 준사가 과연 항왜의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잘 담아낼지 기대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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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인정한 바닷길을 읽는 전략가 어영담 그는 누구인가?이순신이 인정한 바닷길을 읽는 전략가 어영담 그는 누구인가?

Posted at 2022. 6. 5. 22:04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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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인정한 바닷길을 읽는 전략가 어영담 그는 누구인가? 

임진왜란이라는 말도 안되는 전쟁에서 나라를 구해낸 성웅 이순신,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한명이지만 사실 그의 곁에는 조선의 훌륭한 장수들과 이름 없는 조선의 수군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남해의 바닷길을 한 눈에 놓고 판단하는 전략가 장군 어영담의 존재는 이순신 장군에게 그야 말로 천군만마였다. 어영담 그는 과연 누구일까?

 

불멸의 이순신에서 어영담

|어영담의 출생과 광양현감이 되기까지 

어영담은 1532년에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사실 어영담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여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수 없었으나 광양문화원의 연구를 통해 어영담의 과거 급제 문서 '방목'을 찾았고 1532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방목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나이 32살이 되던 1564년 무과에서 전체 11등으로 합격했으며 무과에 붙기 이전에 이미 음직으로 지금의 고흥군 여도진에서 수군만호로 특채된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내금위에서 적순부위(정 7품) 충무위 부사맹을 지낸 어심으로 알려졌는데, 타고난 무관의 가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어영담은 1580년 ~ 1582년 사천현감을 거쳐 1584년 ~ 1585년 무장현감 이후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을 만나게 되는 광양현감으로 1591년 3월에 부임하게 된다.

|어영담 광양현감으로 이순신을 돕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양현감 어영담은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수로를 읽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이었던지라 임진왜란 초기, 자신이 잘 모르는 경상도 해역의 지형과 물길에 대해 걱정이 많았는데 이때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어영담이었다. 어영담은 이미 영남의 바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 이곳 지리와 물길을 완벽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와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어영담의 귀신과 같은 이끎을 받아 큰 공로를 이룰 수 있었다. 얕고 깊은 바다속 상황과 무인도, 험한 암초 등을 다 알고 있어 수군이 영남 바다에서 왜군을 수색하고 토벌할 때 집안 돌아다니듯 했다. 그 때문에 위기가 없었고 전공이 가장 많았다.

-조경남 난중잡록-

이순신 장군은 또한 조정에 장계를 보낼 때 '호남 한쪽이 이제까지 보전 하게 된 것은 어영담의 힘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고 표현까지 하였다. 어영담의 공로로 조선의 수군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합포, 당포, 한산도, 부산포에 이어 1594년 제 2차 당항포해전까지 모두 참전하여 조선 수군의 완벽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어영담 구명활동과 죽음

어영담은 백성을 사랑하는 장군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백성의 삶이 힘들어져 봄에 뿌릴 종자조차 없자 어영담은 이를 해결하려고 장부에 올리지 않고 양곡과 종곡 600여 섬을 따로 보관했는데, 이때 전란시 군의 기강을 확인하려 온 어사 임발영이 이를 발견하고 조정에 상소를 올려 어영담은 파직되고 만다. 

 

그러나 이 억울한 일을 광양에사는 백성 김두 외 126명이 상소를 올려 이순신 장군에게 알렸고 이순신 장군이 요청하여 광양현감을 잠시 유지할 수 있었지만 곧 이어 윤두수 등이 조정에 상소하여 다시 파직된다.   

 

이에 이순신장군은 그를 조방장(대장을 도와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조정에 다시 장계하였고 이를 승낙 받아 조방장으로 이순신 장군을 도우며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승리한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당시 조선 수군에 퍼진 전염병에 걸려 1594년 4월 9일 운명을 달리하고만다. 이때 어영담의 나이 61살이었다. 이순신장군은 어영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난중일기에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96년 4월 초9일(정사)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비가 쏟아졌다. 어 조방장(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 난중일기 -

이순신장군이 어영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 의 아들은 두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를 잇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해로를 읽을줄 알아 어영담은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책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담겨 있는 어영담의 이야기를 봤을 때 그 공훈이 대단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앞으로도 어영담에 대한 조사가 더 많이 진척되고 그의 모습을 표현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왜군을 무찌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어영담이라는 인물이 있었음을 꼭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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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그는 과연 누구인가?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그는 과연 누구인가?

Posted at 2022. 6. 1. 17:53 | Posted in 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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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그는 과연 누구인가?

고려 100년의 무신정권 시대를 연  무신의난 또는 정중부의 난 사건은 무신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인해 발생한 군사 쿠데타였다.

문신들은 무신들을 무시하고 차별했는데 많은 차별 사건 중에서도 대표적인 차별 사건이 있으니 바로 문신 김돈중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이다. 김돈중 그는 과연 누구일까?

드라마 무인시대 김돈중

|김돈중 그의 출생과 정중부 수염 사건

김돈중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다. 따라서 그 집안은 고려가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김돈중은 1144년 (인종 22) 문과에 급제 하여 내시직에 임명되었다. 이때 김돈중이 받은 점수는 2등이었는데 왕이 김부식을 고려하여 1등으로 올렸으니 그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1144년, 고려에서는 섣달 그믐밤이면 궁에서 귀신을 쫒아내는 일종의 축제인 나례가 펼쳐졌는데 이때 내시였던 김돈중이 당시 견룡대정(지금의 대통령 경호실) 정중부의 수염을 장난삼아 촛불로 태운 사건이 발생했다. 수염을 태운 것에는 몇가지 설이 있는데 정중부의 수염이 아름답다 소문이 나있었는데 무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염이라 태웠다는 설이 있다.

이때 정중부는 분노하여 김돈중을 때리고 이를 안 아버지 김부식이 정중부에게 태형을 내려야 한다며 왕에게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인종은 정중부를 아꼈던지라 김부식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정중부에게는 태형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중부는 이미 김돈중을 비롯한 문신들에게 분노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2022.05.28 - [국사/고려] - 고려 무신정권을 열다! 무신의 난 정중부 그는 과연 누구인가?

고려 무신정권을 열다! 무신의 난  정중부 그는 과연 누구인가?

고려 무신의 난을 열다 정중부 그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 나라 역사상 무신이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잡았던 시기, 바로 고려 무신정권 시대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무신정권을 일으킨 장본인

yoosi0211.tistory.com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

|김돈중 무신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1167년 김돈중은 무신들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은 향락에 빠져 살던 왕이었는데, 궁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놀기 바쁜 왕이었다.

이 날도 의종은 외유를 즐기며 신하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런데 이때 김돈중이 탄 말이 실수로 호위를 하고 있는 무신의 말과 부딪히면서 무신이 가지고 있던 화살통의 화살이 튕겨져 나가게 된다. 그런에 하필 이 화살이 의종 앞에 꽂히게 되고, 의종은 암살시도인줄 알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런데, 김돈중은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무신들에게 죄를 덮어 씌웠고 이 일과 관련된 무신들은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 무신들은 다시 한 번 김돈중에게 원한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시사건이다.

|무신정변과 김돈중의 최후

1170년 8월 마침내 정중부가 중심이 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난다. 이때도 의종은 보현원에서 외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문신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김돈중은 자신만 살기위해 도주를 하였고, 이를 늦게 알아챈 무신들은 개경에서 김돈주이 태자를 앞세워 군대를 몰아오면 위험에 빠질 것이라 생각해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김돈중은 개경이 아닌 지금 파주의 감악산에 숨었고 때문에 개경에서는 아무것도 모른채 있다가 무신들의 쿠데타에 그대로 접수 당하게 된다. 그리고 김돈중 역시 얼마가지 않아 지명수배자가 되었다가 시종의 밀고로 붙잡혀 동생 김돈시와 함께 처형 당하게 된다. 또한 이미 죽은 김부식 역시 부관참시 형에 처해지게 된다.

김돈중은 죽으면서 유시사건 때 죄없는 사람들이 나때문에 많은 화를 입었으니 나의 죽음은 마땅한 것이라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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